나는 무슨 이유에서, 기회 있으면 이 영화를 다시 봐야지 하며 기다렸을까. 그건 아마 추억으로 자리 잡은 사랑에 대한 막연한 향수, 그리움에서 싹튼 기다림이었는지 모른다. 기다림은 그리움을 먹고 자란다. 슬픈 사랑 이야기에 눈물 흘리던 나의 젊은 시간도 어느새 아득한 곳으로 밀려가 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영화 <해바라기>에서 인상 깊이 남아 있는 것은 끝없이 펼쳐지던 해바라기밭과 소피아 로렌의 우물처럼 깊은 눈빛이었다. 우크라이나가 어디에 있는지 이름조차 생소하던 1980년대. 전쟁이 사랑을 어떻게 비극으로 몰고 갈 수 있는지 알려준 영화가 내게는 <해바라기>였다.
영화는 드넓은 해바라기밭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젊은 남자와 한 여자의 기약 없는 이별, 그리고 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조용한 이별이 더 아프다고 하던가.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던 지오반나라는 여인의 사랑이 해바라기밭에 진한 노란빛으로 일렁인다. 해바라기와 푸른 하늘의 절묘한 대비가 이미 감정이입이 된 관객의 마음을 쥐고 흔든다. 자신의 태양인 남편만 ‘바라기’하던 '해바라기' 여인.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한 이미지와 여성으로서의 섬세한 감정을 동시에 연기할 수 있는 소피아 로렌을 캐스팅한 감독의 안목이 놀랍다. 그녀만이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으리라.
갓 결혼한 남편 안토니오를 전장에 내보내고 가슴 졸이며 무사 귀환을 빌던 아내 지오반나는 어느 날 비보를 전해 듣는다. 안토니오가 돌아올 수 없게 되었노라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그럴 리 없다며 그녀는 그의 전사를 부정한다. 소피아는 살아 있을 것만 같은 남편을 찾아 사진 한 장 들고 고국인 이탈리아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미친 듯이 헤매고 다닌다.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 시체가 매장된 묘지에 이른 그녀. 과거 해바라기밭이었던 그곳에는 나뭇가지로 만든 십자가가 해바라기 숫자만큼이나 많이 꽂혀 있다. 혹시,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녀가 전사자 이름을 일일이 확인할 때마다 관객도 숨을 죽인다.
그녀를 떠올리면 오로지 태양만 바라보며 피고지는 소박한 해바라기꽃이 연상된다. 태양을 향한 그 맹목적인 사랑을 지키려는 그녀의 집념은 무섭도록 강인하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꿈에도 그리던 안토니오를 만나게 되지만, 운명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는 군부대에서 낙오되어 혹독한 추위에 기억을 잃고 죽을 뻔한 자기 목숨을 구해준 여성 마샤와 결혼하여 살고 있다. 그토록 찾던 자기 남편과 가정을 이루고 있는 한 여자를 응시하던 지오반나의 표정. 절망으로 무너져 내린 가슴을 그 이상 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태양을 잃어버린 지오반나는 실성한 듯 고향으로 돌아와 그와의 감정을 정리하고 모든 추억을 어둠 속에 묻으려 한다. 기억은, 그리움이라는 회로를 따라 순환하다가 어느 순간 무의식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 잊고 싶다고 잊을 수 있을까. 뒤늦게 기억을 되찾은 안토니오가 그녀를 찾아오자, 잊힌 줄 알던 아픈 추억이 가슴을 헤집고 살아난다. 더는 젊지 않은 그녀도 이제 가정을 가진 여자다. 서로 다른 가정을 꾸렸다는 매운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그와 그녀다. 우리 사랑은 여기까지구나, 하고 인정하며 체념으로 순응하기까지 인간이 견뎌야 하는 갈등은 얼마나 복잡하고 잔인한가.
결별의 아픔을 절절히 경험한 그들이었기에, 무겁고도 질긴 가족이라는 이름만큼은 지키기로 한 것일까. 멀어져 가는 안토니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박제된 듯 서 있던 소피아 로렌. 슬픔덩어리가 너무 크면 토해내지 못하는 것인지. 이제 그녀도 귀밑머리가 희끗하다. 사랑을 찾아 헤매느라 청춘을 소진한 허무한 세월이 무연히 서 있는 그녀를 위로하듯 가만히 더듬고 지나간다. 떠나는 남자와 남겨진 여자 사이에 해바라기밭이 들어선다. 하나가 될 수 없던 그들. 그는 태양으로, 그녀는 해를 바라보던 꽃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온 것일까.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듯이.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밭에 또다시 전쟁이 들어선 지 일 년이 넘는다. 세상을 밝히던 빛과 색을 찰나에 지워버리는 전쟁은 모든 것을 무채색으로 바꾸어버린다. 되풀이되는 전쟁에 소중한 생명이 흩어지고 무고한 삶이 붕괴되며 가족도 가정도 의미를 잃고 있다. 오늘도 뉴스는 비관적인 전황을 전한다. 영상은 세 살배기 아들을 안아 들고, "아빠 곧 돌아올게"라며 얼굴을 비비는 젊은 아빠에게 초점을 맞춘다. 아들한테가 아니라 스스로 다짐하는 말 같아 나는 목이 멘다. 아들만 전쟁터에 내보낼 수 없어 자원입대했다는 초로의 남자가 화면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짧은 탄식이 새어 나온다. 운명의 여신은 과연 저들을 평온했던 일상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을까.
영화 <해바라기>에서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전쟁이라는 일그러진 욕망의 군화에 짓밟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아물지 못할 상흔이 되고 만다. 하지만 언젠가 해바라기꽃은 다시 피어날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그 불변의 진리를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감정 중 가장 값있고 아름다운 사랑, 그 사랑 이야기는 어느 하늘 아래에서도 멈추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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