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의 숨소리가 들려

 

시계를 그린 화가가 있다. 화가의 놀라운 상상력과 창의력이 시계 세계를 조용히 흔들고 있다.
정물화도 풍경화도 아닌 추상화, 아니면 그 세 가지를 합해 놓은 그림 같기도 하다.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 그림 ‘기억의 지속’을 보고 있다. 축 늘어져서 나뭇가지와 사물 위에 걸쳐 있는 구불구불한 타원형 시계는 섬뜩한 부드러움이다. 현실을 벗어난 그림 속의 황량하고 권태로운 시간마저 녹아내리게 하는 그 힘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느낄 수는 있다.
그림이라는 공간에 갇혀있는 시계를 구불거리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이미지 자체일까. 어떤 형태로든 삶은 계속되듯이 시간의 흐름 또한 영속적이다. 의식의 시간은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흐른다. 그림 속 시계들은 각자의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이미 시계로서의 의미를 잃은 기이한 이미지 안에, 축적된 삶의 기억이 일부는 편집되고 일부는 망각된 채로 존재한다. 감상해야 할 그림이 아니라 풀어야 할 수수께끼 같다. 정지된 시간을 은유하는 시곗바늘에서 나는 어찌 흐릿한 숨소리와 심장 뛰는 소리를 듣는 것일까.
그의 그림은 지워버리고 싶던, 정지된 채 지나간 내 시간을 들춰내려는 듯했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누워 지내던 시간, 흐늘거리며 무너진 내 몸과 나의 정신마저 옭아맸던 시간의 원형이 그대로 그림에 재현되고 있었다. 시곗바늘이 몇 걸음 움직이다가 그것도 숨이 차서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어쩌면 더는 가지 못하고 그대로 영영 멈출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던 시간이 눌어붙은 형상처럼 보였다. 그건 아마 내게만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담당 의사는 나에게 수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구나…, 하며 나는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고 다행히도 의사는 20초쯤 되었을 그 영겁 같던 시간을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다른 대안은 없어 보였다. 간단한 수술이라고 설명하는 그의 눈빛 너머의 의미를 읽을 용기도 없었지만,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게 차라리 위안이 되었다. 막상 수술하는 날은 담담한 심정이었어도, 그것이 치료의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내 삶 전체가 기우뚱하는 느낌이었다. 그 후로 이어진 중력을 잃은 듯 부유하는 시간은 참으로 더디게 내 생의 페이지를 채워갔다.
모든 것을 내버리고 도망치고 싶던 무렵, 녹아내리는 시계가 ‘기억의 지속’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내 의식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타의에 의해 그림 속에 억류된 또 하나의 녹아내리는 시계였다. 내 옆에도 앞에도 뒤에도 나와 비슷한, 움직이지 못하는 시계들이 즐비했다. 세상에 고장 난 시계가 그리 많다는 걸 처음 안 것처럼, 나는 처음 보는 낯선 세상을 두리번거리며 몸을 떨었다. 그 세계에 던져지던 순간 나는 내 목소리를 잃었다. 재깍거리며 활기차게 행보하던 내 안의 초침 소리가 멎은 것이다. 나의 모든 기억은 거기에서 멈췄고 더는 지속하지 않았다.
‘기억의 지속’이라는 그림 속에서, 나의 삶은 ‘지속’이 아니라 내가 관계 맺고 있던 세계와 ‘단절’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했다.
하지만 시간의 힘이란 묘한 것이어서, 그 그림 속에 머무는 동안 내가 속해 있는 세상의 풍경을 내 방식으로 해석하는 언어를 익힐 수 있었다. 상흔이야 남겠지만 살아서 나오려면 그래야 했다.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마음을 당기는 내밀한 힘에 기대어, 언젠가는 그림 밖으로 나가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접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나왔다.
내가 어떻게 그림 밖으로 나왔을까.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며 기어 나올 때 그림 안팎의 경계에 있던 다른 시계들은 숨죽이고 나를 지켜보았다. 침묵이라는 불안한 희망이 먼지처럼 떠다니는 그곳에서 그들이 보여준 독특한 반응이었다. 내가 그 세계를 떠난다는 것 그 이상을 그들은 알려고 들지 않았고 나도 알지 못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가 그림 속의 공간을 벗어나면, 내 안의 시계가 재깍거리며 다시 규칙적인 숨을 쉬기 시작하리라는 것, 나는 그것을 희원하기도 벅찼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물리적인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심리적인 시간은 누구에게도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 구불거리는 곡선이기 때문이다.
심리의 시계와 주관의 시계는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느리게 또는 빠르게, 부드럽게 또는 날카롭게 흐르도록 조정한다. 잃어버린 건강을 회복할 때, 몸은 물론 정신의 허기와 갈증을 못 이겨 허덕거리던 시간이 유난히 더디고 둔탁하게 느껴졌듯이.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어지러우리만치 빨리 지나갈지도 모른다.
어두운 시간의 터널을 빠져 나오자 비로소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똑딱거리는 숨소리를 토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모든 소리와 움직임이 사라진 것 같던 정적에서 내가 정말 벗어났는지 확인하고 싶어 내가 없는 동안 달라졌을 주위를 둘러본다. 이제 세상을 전보다 조금 더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어두운 세상에 던져져서 비록 가슴 쥐고 아파하던 시간이었어도, 아픔 끝에 얻은 것도 있으니 그러면 됐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세상의 모든 아픈 시간은 그러면서 지나가는 것이라고. 이제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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