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낯설음으로
여행에서 돌아왔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뒷마당으로 나왔다.
새소리, 빗소리 아름다운 아침이다.
머얼리 기차가는 소리가 빗소리와 먼 천둥소리의 배경음이다.
하얀 무궁화꽃이 이쁘다.
나의 흰색에 대한 선호감이 유달리 이 꽃을 이쁘게 보이게 한 것일 것이다.
연보라빛 도라지꽃이 잡초들 속에서 당당히 피어 있다.
까칠한 주홍빛 한련화가 애처러워 보인다.
대문간 위에서 자라는 주홍빛 능소화가 화려하지 않지만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우리 큰아들 결혼식 하던 그해 여름에 얼마나 무성하고 화려하게 자랐는지, 그 여름 그꽃의 기억이 선명하다.
우리는 이 꽃으로 신랑신부의 무대를 장식 했었다.
그때 손님들이 화려하고 예쁘다고 감탄의 말씀들을 하였다.
40일 만에 집에 돌아오니, 나 없는 동안에 달맞이꽃들과 양귀들은 피었다가 지고
그들과 함께 잡초가 무성하게 어우러진 모습이 익숙한 낯설음으로 내게 다가온다.
꽃들이 지고난 양귀비의 씨봉오리와 마른 줄기들을 보며 지난 해에 화려하게 피었던 그 꽃들을 기억해 본다.
이렇게 마른 줄기와 잡초들 속에서도 활짝 웃는 도라지꽃을 바라보며 나 없는 동안 피고 져버린 달맞이꽃과 양귀비꽃에 대한 서운함을 달래본다.
잡초와 내가 선호하는 꽃들이 다 같은 식물임에도, "나"의 차별로 나에게 '그렇게' 인지된 채로 이들이 살아간다.
앞마당에 모과나무는 보니 주홍빛으로 아름답게 불타던 꽃들은 사라지고, 맺어 커가는 모과열매들에 내가 아직 알 수 없는 진드기 병원체들이 달라붙어 있는데 이 모과나무가 힘들게 싸우며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이다.
전에 잘 익은 모과를 한 바구니 딴 것을 기억하며 비교하면, 이 고장의 겨울이 전보다 덜 춥기에 추운 겨울에 얼어죽어야할 병균들이 살아서 판치는 느낌이 든다.
모과나무의 이 고통스러운 모습이 마치, 세상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과 싸우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고통을 보는 것 같다.
모과나 과일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열매로 사는 것이 아니다.
여행 전에 손톱만한 상추모종을 옮겨 심어는데 제법 크게 자라서 둘째 아들이 이 상추 잎들을 잘 따먹었다고 한다.
또 그때 같이 모종을 옮겨 심은 들깨도 많이 컸다.
무성한 깻잎들을 보니 오늘 저녁상에는 상추와 깻잎이 오를것 같다.
뽕나무 밑에 가보니 아직도 오두개가 달려 있다.
너무 높이 달려 있어서 따 먹을 수가 없다.
푸르름을 푸르게 푸르게 자랑하는 내가 씨를 주어다 심은 은행나무는 이제 상록수들 보다 키가 크다.
줄로 서 있는 상록수는 내 배꼽 높이의 큰것들을 사다가 심었는데 그동안 자라고 자라서 내가 심을 때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초록으로 초록으로 잘커서 너무 좋다.
내 그림에 자주 나오는 둥그스름한 나무 모습은 저 상록수가 영감의 근원일 것이다.
상록수 밑에는 아내가 좋아하는 수국이 연분홍으로 피어있다.
수국꽃 색은 해마다 진하거나 연하거나 다르게 피어난다.
이제 비는 그치고 비 끝에 부는 한자락의 강풍이 휘이 부는 바람에 나뭇잎들에 묻어 있던 물방울들이 나를 비로부터 막아주고 있던 파라솔 천 지붕을 세게 때린다.
그 한줄기 바람과 물방울 때리는 소리가 내 정신을 깨우고 있다.
온통 잡초에 묻혀버린 부추밭이 생각났다.
부추와 잡초가 같이 살 수는 없지.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보는 집안의 사물들과 항상 마셨던 커피 한 잔이 익숙한 낯설음이다.
내 삶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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