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은 이집트 맘루크시대(1250~1517), 오스만튀르크(1517~1918)까지 이슬람 지배 속에 있었다. 예루살렘은 2차 대전까지 영국령이었다가 시온주의(Zionism)를 표방한 유대 국가,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포됐다. 이스라엘 통일 왕국부터 로마에 의한 멸망까지 1000년은 유대교,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 등 500년은 기독교, 나머지 1300년은 이슬람교가 지배했다.
이스라엘 건국 후 75년간 축적된 보복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알아크사(Al-Aqsa) 사원, 평소에는 성지 순례자들로 붐비던 곳인데 긴장과 두려움이 뒤섞여 서로를 향한 뿌리 깊은 증오는 ‘피의 보복’으로 분출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충돌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국가를 세운 이후 본격화했다. 유대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저항했다. 토지 소유권 문제가 분쟁의 이유였지만, 갈등의 기저(基底)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까지 포함된 ‘아브라함의 종교 간 대립’이 밑바닥에 짙게 깔려 있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기습공격으로 이스라엘에서 수 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또 이스라엘이 보복공격에 나서면서 팔레스타인에서 역시 사상자(死傷者)가 속출하고 있다. 하마스, 이슬라믹지하드와 이스라엘 방위군(IDF) 간 교전(交戰)이 더욱 격렬해지는 가운데 가자(Gaza)지구에 전기, 식량, 물, 연료 공급중단을 포함한 전면봉쇄가 단행된 가자지구는 대혼돈(chaos) 상태를 방불케 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안전한 곳이 전혀 없다”며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의 건국선언과 아랍·이스라엘 전쟁 때 70만 팔레스타인이 추방당한 사건으로 대재앙을 뜻하는 ‘나크바(??????·재앙)’를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번 공격은 16년간 이어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와 서안지구 공습, 알아크사 모스크(아랍어: ?????? ??????; 히브리어: ???? ??-????; Al-Aqsa Mosque) 모독에 대한 대응이다.”는 하마스의 지도자 무함마드 알데이프는 성명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공격 작전에 대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조이며 하마스와 물리적 충돌을 이어왔다”는 주장이다. 하마스의 목적이 단순한 보복만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중재로 관계 개선에 나서는 등 ‘중동 데탕트(detente·긴장완화)’ 분위기에 고립을 우려한 하마스가 존재감을 부각하려 나섰다는 것이다. 오랜 중동 화약고의 불씨를 덮으려던 국제회의 시도가 오히려 전쟁으로 번진 양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하마스의 침공 시점도 유대교의 안식일이었던 지난 7일(토요일)은 유대교 7대 명절 중 하나인 수코트(草幕節)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초막절은 출애굽(出埃及) 후 광야(廣野)생활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 장막(帳幕)을 치고 즐기던 축제다. 1973년 ‘욤키푸르(贖罪日) 전쟁’으로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도 유대 명절인 속죄일에 발발했으며, 이제 50년 만에 대규모 희생을 동반한 전투가 벌어지며 제5차 중동전쟁을 우려하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UN사무총장은 “하마스 공격은 정당화 될 수 없을뿐더러, 위협에 노출된 이스라엘도 국제 인도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지만 이래서, 저래서, 그래서, 점철된 전쟁은 정치적인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는 것은 화사첨족(畵蛇添足)일 테다.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의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를 간구(懇求)해 마지않는다.
또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공습이 강화되는 최근 움직임이 지상군 투입을 위한 사전 작업 성격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150여 명의 인질을 ‘인간 방패’로 앞세운 하마스에 맞선 이스라엘 정부로선 섣부른 지상군 투입이 딜레마일 수도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상군 투입을 통한 가자지구 침공은 이스라엘에 불가피한 선택지로 보이지만, 막대한 인명피해 등 여러 위험 부담을 안게 되며 성공여부도 확실치 않다고 분석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지상군 투입을 고심하는 가운데 예비군 총동원령이 내려졌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스라엘은 50년 전인 1973년 10월 4차 중동 전쟁 때도 이집트의 기습 침공에 치명타를 입고 전쟁 초기 열세를 면치 못했다. 1967년 3차 중동 전쟁 때 사망자는 이스라엘 1000명 이하, 이집트 등 아랍 연합군은 2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욤 키푸르라는 유대교 명절에 허(虛)를 찔린 이스라엘은 사망자 2800명이라는 큰 인명피해를 봤다.
전쟁 초기 퇴각을 거듭하던 이스라엘은 3차 중동 전쟁에서 대승해 시나이반도를 차지하고 수에즈 운하 앞에 모래 언덕을 쌓아 방어 경계선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집트군이 동독에서 수입한 소방펌프로 물을 쏴 모래방벽을 허물어트리면서 쳐들어간 것이다. 모래벽이 있으면 이집트군이 타고 넘어오는 데 오래 걸릴 것으로 보고 방심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물 펌프’에 모래 방벽이 2시간 만에 뚫렸다. 하마스가 분리 장벽과 철책을 불도저와 패러글라이더로 무력화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50년 전에도 벌어졌었다.
이스라엘은 동원령을 발동해 지상군을 충원하고 탱크 부대를 앞세워 이집트와 맞섰다. 당시 골다 메이어 총리는 미국에 SOS를 쳤다. 미국은 각종 무기를 지원했고, 소련을 설득해 이집트에 전쟁 중단을 유도했다. 결국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시나이반도에서 탱크 전투를 거듭하다 수에즈 운하 뒤로 철군하며 전쟁은 끝을 맺었다. 이집트는 전쟁 대신 이스라엘과 손을 맞잡기로 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시나이반도를 돌려줬다. 두 나라는 Camp David 평화 협상 등을 거쳐 1979년 국교정상화(國交正常化)를 이뤘다.
“주여, 저희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자신을 버리고 죽음으로/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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