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은 알고 있다

 

-아카디아, 프렌치 캐네디언 편-

 

캐나다에 산 지 50년, 이민 초기 몬트리올에 5년간 살았고 그 후에도 자주 퀘벡주의 동쪽 퀘벡시티 부근까지는 갈 기회가 있었으나 그 너머 대서양 연안까지는 갈 기회가 없었다.

이후 한 일주일간 간격을 두고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시아 그리고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여행을 하였다.

 

캐나다 인구는 4천만 명을 겨우 넘었지만 땅덩어리를 놓고 보면 대서양과 태평양을 관통하는 세계 제 2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은 강대국이다. 캐나다의 웅대한 자연을 생각하면 서부 로키 산맥을 떠올리기가 싶다. 하지만 캐나다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동부 대서양으로 향해야 한다.

 

고대 유럽문명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생하고 성장해 왔다. 초기의 배는 선원들이 노를 저어서 가는 크기가 작은 형태였고, 그런 배로는 육지로부터 멀리 벗어나기 어려워, 지중해를 떠나 대서양의 넓은 바다로 나갈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기존의 개념과는 다르게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바다 서쪽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다른 대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콜롬부스였다. 그는 출항하기 전 지도제작 일을 하고 있었는데, 바다 서쪽 끝에는 인도나 중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왜, 콜럼버스는 육로가 아닌 바다로 인도나 중국에 가려 하였을까?

 

그 이유는, 15세기 유럽은,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비단, 향신료 등이 유럽으로 전해져 중요한 시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제국이 이스탄불을 점령하면서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따라서 육로가 아닌 해로를 찾게 되었는데, 1492년 8월3일 콜롬부스는 스페인 가디스를 떠나 같은 해 10월12일 두 달여 만의 항해 끝에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했다.

당시 콜롬부스는 이곳을 인도라고 오인하고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을 실제로 처음 발견한 유럽인은 콜롬부스가 아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캐나다는 그보다 500년 더 앞선 AD 1000 년경에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족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니까 천 년쯤 전에 바이킹족의 어부들이 물고기 떼를 쫓아 캐나다 동북쪽 변두리 지역까지 왔었다. 당시에는 물고기가 넘쳐나 그물 광주리만 바다에 던지면 물고기가 그물 가득히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 물고기들은 주로 대구(COD)라 불리는 생선이었는데, 바이킹들은 여름 동안 바다에서 퍼낸 생선을 소금에 절이기도 하고, 가을에는 햇빛에 말리기도 하다가 겨울에는 추위를 피해 고향으로 간 흔적이 뉴펀들랜드 래브라도를 비롯해 캐나다 대서양 연안에서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 지역을 5백 년 후 영국의 존 캐벗이 발견해 새로 찾은 땅이라 하여 ‘Newfoundland’라 부르게 되었다. 영국으로 돌아간 캐벗은 새 대륙과 대구(Cod)어장을 발견했다고 자랑하였지만 두 번째 항해에선 실종됐다.

 

이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도 루이 14세의 명을 받은 ‘자크 카르치에’가 신대륙의 탐험을 위해 항해를 하게 된다. 1535년, 대서양과 연결되어 있는 지금의 세인트 로렌스 강을 따라 현재의 몬트리올에 도착한 그는 캐나다 원주민들을 만나게 되며 그들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묻는 이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는 이 땅의 주인들은 어떻든 '카,나,타'라 말하게 되었으며, 그 후 카르티에는 이 땅을 ‘캐나다’라고 명명(命名)했다. 

 

그후 1604년, 프랑스의 가톨릭신자이며 경략가인 ‘샤플레인’이 100여 명의 첫 번째 이민자들과 함께 프랑스를 출발해 이 지역을 탐사하며, 그에 의해 처음 정착촌이 들어선 곳이 현재의 노바스코시아의 ‘포트 로얄’이다, 당시 캐나다와 미국 동북부 해안에 정착한 사람들을 아카디안(Acadian)이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PEI를 비롯한 캐나다 동부연안을 여행하다 보면 프랑스 삼색기에 별이 하나 박힌 아카디안 국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 먼저 정착하여 원주민들과 평화롭게 살던 아카디안들에게는, 1753년 이후 이 지역이 프랑스령에서 영국령으로 넘어가면서부터 비극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1755년 7월28일 영국정부는 14세 이상의 남자를 교회로 불러모아 프랑스를 겨냥해 총을 들던지 아니면 이 땅을 떠나라고 최후 통첩을 했다. 그러나 아카디안들은 자신들과 같은 피를 나눈 프랑스인 그 어느 누구에게도 총을 들지 않겠다는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게 된다. 결국 아카디아인들 중 3분지2인 1만 6천 명이 강제로 추방되며, 2년여에 걸쳐 그들은 영국인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북미 13개 주에 여러 차례 분산 퇴거를 당하게 된다.

 

나는 50여 년 전인 1975년, 약 5년간 몬트리올에서 거주한 적이 있었다. 내가 몬트리올에 거주하고 있던 당시 퀘벡주는 한국전쟁 기간 중 캐나다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한국과 인연이 있었던 ‘르네 레벡’(Rene Le ‘Vegue)의 퀘벡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급진적인 프랜치 캐나다인들은 1760년대 이래 그들이 영국의 통치 하에 있고, 그 후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불어 문화가 영어에 잠식당하여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 등장한 퀘벡당의 르네 레벡은 불어만의 헌정법을 발표하게 된다. 거의 50여 년이 지났다. 많은 외국인들은 지금의 퀘벡이 프랑스보다도 더 프랑스 같다고 한다. 실제로 모든 것이 불어로 되어 있다. 앵무새도 영어만하면 고발되는 곳이 퀘벡이라고 한다. 옛날 50여 년 전 퀘벡에서는 영어만 해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불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퀘벡에선 생존하기에 힘든 곳이 되었다.

 

퀘벡의 분리주의자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퀘벡주의 독립을 꾸준히 주장하고 있다.

 

캐나다를 상징하는 국가인 ‘O Canada’ 가사는 1880년 프랑스어로 작사된 후 영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쓰여지고 있다.~~~~~The True North strong and free! From far and wide,~~~~~

(“진정한 북쪽의 강함과 자유여! 저 광활하고 넓은") ‘오! 캐나다’ 캐나다 국가의 가사의 의도처럼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캐나다가 분열되지 않기를 바란다.

2024년 7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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