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둔 아이젠하워 장군(왼쪽)
"침공 이후, 24시간은 결정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연합군에게나 독일군에게나 이 순간은 제일 긴 하루(The Longest Day)가 될 거야. 제일 긴 하루가"! -에르빈 롬멜- [영화 사상 최대의 작전에서(The Longest Day)]
1944년 6월6일 아침, 15만6,000명의 연합군이 영국 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진군을 개시했다. 이들 중 13만2,000명은 바다를 건너 상륙 하였으며 2만4,000명은 공수작전으로 강습, 투하 하였다.
-연합군, 육해공, 장병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수개월에 걸쳐 준비한 위대한 성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용맹한 동맹과 다른 전선의 전우들과 함께 독일의 군사력을 돌파하고 탄압 받고 있는 유럽시민들에 대한 나치의 폭정을 몰아내고 자유세계에서의 안보를 지켜낼 것입니다… 적들은 무자비하게 싸울 것 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1944년입니다…. 이제 전세는 역전 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자유 시민들이 우리와 함께… 우리는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무운을 빕니다. 그리고 이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는 우리에게 전능하신 신의 가호가 있기를!" -드와이트 디 아이젠하워-
1944년 6월6일 당일 아침 프랑스로 진격하는 연합군 모든 장병에게 전달된 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의 명령서를 요약한 것이다.
연합군의 보병사단 및 기갑사단은 길이 80km 노르망디 해안 5개 구역(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소드) 침투작전을 시도하였다. 해변을 내려다보는 독일군 요새에서는 총탄이 빗발쳤고, 사상자는 절벽이 높은 오마하 해변에서 극심했다. D-day 당시의 날씨도 결코 이상적이지 못하였고 강풍으로 인해 일부 상륙선은 의도한 장소에서 동쪽으로 밀려났으며, 해안은 지뢰를 비롯해 나무말뚝, 철선 등의 장애물이 널려 있어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는 임무는 매우 어렵고 위험했다.
첫날, 전투 중 사망자는 독일군이 4,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고 연합군은 확인된 사망자만 4,414명을 기록했다. 연합군은 많은 병력 손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만에 목표한 임무를 달성 하는 데 실패하였다. 상륙 첫날 서로 연결된 해변은 '주노'와 '골드' 두 장소뿐이었고, 다섯 상륙지점이 모두 연결된 것은 6일 후인 6월 12일이었다.
#사라져가는 노르망디의 노병들.
주노해변은 골드해변 동쪽과 소드해변 서쪽 사이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서 제 3 캐나다 보병사단이 담당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1944년 6월6일, 디-데이 새벽 당시 19세였던 몬트리올 출신의 빌 로스(Bill Ross)는 전우들과 함께 해변가에 상륙하여 목표지점인 베르니에르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장병들은, 작전 개시 전의 해상 폭격과 공군의 폭격이 전투를 수월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러나 사전 폭격은 예상했던 것보다 비효율적이었으며, 거친 날씨 또한 상륙작전의 장애물로 작용하여 선발대의 진격은 07:35분까지 지연된다. 빌 로스가 소속되어 있는 상륙부대는 독일 제716사단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많은 전우들이 전사하며, 죽은 전우들의 시체를 밟고 밟으며 돌진했다. 밤 9시가 되어 해가 떨어져 참호를 파고 지친 몸을 쉬게 되었을 때, 그가 소속되어 있는 보병사단은 어느 연합군 부대들의 디-데이 목표보다 더 큰 진군의 성과를 얻게 된다.
80년이 지났다. 2016년 91세로 노병 빌 로스는 이 세상을 하직하였으나, 80년 전 그의 전우들이 진군했던, 피로 얼룩졌던 12 킬로미터의 길을 회상하며, 또 기억하기 위해 현지의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노병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걷는 기념행사를 거행하였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올해 102세인 미국인 2차대전 참전 용사인 로버트 페르시치티 씨가 노르망디에서 열린 상륙작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현지로 가는 도중 사망하였다고 한다. 평소 심장질환이 있던 노병 페르시치티 씨는 장거리 여행의 위험을 감수하고 유럽을 찾았다가 중간 기착지의 노르망디로 가는 선박 안에서 응급 의료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항공편을 통해 독일의 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끝내 사망하였다 한다.
올해 100세로, 20세 때 캐나다공군 정찰기 조종사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던 노병 리차드 로멀(Richard Rohmer)은 디-데이 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나기 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1944년 당시만 해도 히틀러 치하의 나치군대는 조직이 잘 되어 있는 군대였고, 세계를 장악하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을 때였다. “만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패했더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계는 독일의 나치와 유사한 권위주의 정권이 활개치는 판도로 변모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번 방문이 매 10년마다 열리는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80년 전 권위주의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흘린 전우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마지막 염원은, 100세 노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로 향하게 하였다.
세계 1차대전이 끝난 지 10여 년 후 1930년대 초, 유럽은 새로운 권위주의(Authoritarian) 정권의 출현을 목격하게 된다.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이태리의 무솔리니 그리고 제3 제국(The Third Reich)이라 불렸던 독일 히틀러의 나치(Nazi)정권이다. 나치독일은 정부 국민들의 삶을 통제하는 전체주의적인 독재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세계는 민주주의 체제인 연합국과 권위주의 정권인 전체주의 국가와의 격돌 장소로 변모하게 된다. 이 권위주의 정권의 상징인 나치 독일의 예봉을 꺾은 것이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 불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그 후 11년이 지난 1945년 5월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멸망하게 된다.
80년이 지났다. 그간 세계는 놀랄 만한 변화를 이루었다. 20세기 역사의 시계추를 돌려 놓았던 역사의 주역들인, 참전용사들은 사라져 가고 있다. 모든 참전용사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하더라도 노병은 죽지 않고 기억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인류가 발견한 최대의 정치 시스템이라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해변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젊은 나이의 병사들과 그들의 전우였던 노병들을!
2024년 6월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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