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은 1959년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이다. 정치깡패 임화수가 제작하여 만든 영화로서 당시 인기배우가 총 출연하였는데, 일반 제작자였으면 불가능한 캐스팅이라 할 수 있다. 1960년 대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관제영화이기는 하나 내용 자체는 이승만에 대한 특별한 과장 없이 어느 정도 사실에 입각했다. 이 영화가 제작되었을 당시만 해도 대한제국시대를 경험한 인물들이 생존해 있던 시대로서 당대의 복식이나 시대상, 어투 등이 잘 재현되었다고는 하나, 이승만이 완전무결한 선역으로만 그려졌다는 비판이 있었다.
임화수: 어, 김희갑이? 너 잘 왔다. 이리와 이 새끼야.(그의 부하들이 김희갑을 끌고 와서는 무릎을 꿇린다.) 야 합죽이! 너 이 새끼야, 너 죽어야 알겠어?
김희갑: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임화수: 뭐? 뭐가 어째? 야, 이 새끼야! 너 지난번 내 작품에 바쁘다고 출연 거부했다면서? 그리고 이번 소집 때 왜 안 나왔어?
김희갑: 그거야 나도 사정이 있으니까 못 나오는 거 아닙니까?
임화수: 뭐라고? 사정? 너 이 새끼가!
김희갑: 도대체 왜 때리시는 것입니까?
김희갑 구타사건 또는 합죽이 구타사건은 제1 공화국 말기인 1950년대 말 제 4대 국회의원 선거 때로, ‘청년 이승만’ 영화 출연과 정치행사에 참여하라는 임화수와 동대문상인연합회의 요구를 김희갑이 거절하자 임화수가 김희갑을 폭행하여 전치 4주라는 큰 상처를 입혔던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로 알려져 있는 임화수는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정치깡패로 악명을 날렸고, 권력을 이용해 영화제작에 관여하였으며, 연예계의 황제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연예계 밤의 대통령이었다.
사사오입 개헌은 1954년, 제 3대 국회에서 정족수 미달의 헌법 개정안을 위헌으로 통과시킨 사건이다. 그 헌법개정의 주요 목적은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 집권이었다.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었다.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1952년 발췌 개헌을 통한 직선제로 2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당연히 1956년 대통령 임기가 만료되면 더 이상 대통령을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승만과 집권여당인 자유당은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을 추진하게 된다. 1954년 9월6일 136명의 의원의 찬동 서명으로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된다. 개헌안의 표결은 11월 27일 비밀투표에 부쳐졌다. 개헌을 위해서는 재적의원 203명의 2/3이상, 135.33명 이상의 찬성표가 필요했다. 그러나 표결 결과는 가결 135표, 부결 60표, 기권 7표가 나와 1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11월 28일, 자유당과 정부는 수학적으로 '사사오입'을 설명하면서 “소수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이 될 수 없으므로 반이 안 되는 소수점 이하는 삭제해야 한다”는 논리로 헌법개정안 가결 통과를 발표했다.
이 위헌이자 무효인 개헌으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은 개국의 대통령으로 추앙 받을 수 있었던 위치에서 독재자로서의 이미지가 공식화 되고 반민주주의 상징이 된다.
그렇다 할지라도, 비록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권위주의적 통치를 했고, 3.15 부정선거와 같은 수많은 오점을 남기었지만, 기본적으로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미국식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확립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또한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고, 미국에서 활동한 덕분에 국제정세에 대한 선견지명이 있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약소국가의 대표로 어떤 외교를 펼쳐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1953년 6.25전쟁 막바지에 아이젠하워의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 국민의 다수 의견을 무시한 채 단독으로 휴전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1953년 6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한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휴전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연합국 측이나 스탈린의 죽음으로 맥이 빠져 있던 공산 측까지 모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예측 불허의 지도자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 당시, 동북아에서 일본 중심의 국제질서로도 얼마든지 공산주의를 견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미국의 입장에선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와 국군 20개 사단으로의 증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게 된다.
한국동란 후,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론을 내세우며 강력한 반공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 하에서 정치는 혼란을 되풀이할 뿐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1960년 3월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부는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은 부정선거에 궐기하여 4 .19혁명을 성사시키게 된다. 4.19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들이 일으킨 혁명으로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뒤, 1960년 5월29일 이승만 박사와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하와이로 망명을 한다. 5년 후 1965년 7월23일 유해가 되어 말없이 돌아왔다. 4일이 지난 7월27일, 서울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을 한 뒤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많은 대한민국 국민은 정치인으로서 이승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건국 대통령으로서는 존경을 보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남 이승만 박사의 공적이 그의 과오에 의하여 퇴색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공로가 과오의 면죄부가 되어서도 아니 된다.
2024년 2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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