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전하는 뉴스를 볼 적마다 한숨이 나온다. 우습게 돌아가는 사회의 꼴이 점입가경이다. 왜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가? 한국이 경제적 성취와 민주정치를 이룩한 것은 세계사적 관점에서도 대단한 위업이었는데 말이다. 그 과정에 많은 선진국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업신여기고 비아냥대던 때도 참 많았다. 또한 국내의 수구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이 누리던 특혜가 사라질까 봐 민주화 투쟁을 비꼬거나 적극적으로 훼방 놓기도 했다.
2022년 3월 20대 대선에서 윤석열이 정권을 차지한 데는, 진보 정권이 추진하던 민주화로 인해 그때까지 누리던 특혜를 박탈당할 위험(?)에 맞닥뜨리게 된 기득권 세력이 한 덩어리로 뭉쳤고, 이미 기득권자로서 경제적 이익을 누리던 언론사들이 합세해 나팔을 분 것이 주효했다. 집권 5년 동안 큰 노력은 했었지만, 인사나 안보 정책 면에서 비굴한 자세로 일관하던 문 대통령에게 실망한 청년층도 상당수 이에 가세했을 것이다.
자연재해는, 공들여 이룬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다 흔히 인명까지 앗아가는 참사慘事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전의 재난에서 이미 많은 교훈을 얻었고, 대응책도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맛’이라고 했다. 대비책이 마련되고 법 규정이 있다 해도, 일선 공무원들이 나태하여 필요한 때 요구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대비책이 없는 것과 같다. 7월 15일 청주 오송 궁평2 지하차도 참사, 예천군 감천면 일대의 산사태로 인한 참사는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참사, 2022년 10월 29일의 이태원 참사를 떠올리게 하고, 그때 공무원들이 저지른 잘못에 비교되는 것은 당연하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에서 교훈을 하나도 얻지 못하여 인재人災가 되풀이하는 것을 보는 심정이 착잡하다.
사고가 발생하던 전후에 상황을 적극 통제하고 이끌어야 할 공직자들이, 책임을 외면하거나 타성에 젖은 처신으로 재난의 규모를 키운 셈이었다. 그들이 말장난으로 책임을 피하려거나 엉뚱한 짓을 하면서, 그 참사는 인재로 굳혀진다. 이에 이르러 공직자들은 자신의 존재 의의마저 잃게 된다.
그런 위험이 임박했거나 시작되던 엄중한 순간에, 대통령은 지구 반대편에 가서 한가하게 다른 나라의 안보를 걱정해 목청을 높이고, 16명의 경호원에 둘러싸인 부인은 명품 매장 5곳을 독점하여 물건을 구입했고, 그다음 날 사람을 보내 추가 구입도 했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는 우리의 궁금증을 조금은 풀어준다. 그런 한국 대통령 부부의 행태도 이제 15개월쯤 봤으니 알만한 일이지만, 유사한 비상사태가 발생했다고 해서 국제회의 도중에 급히 본국으로 달려갔다는 이탈리아 총리, 캐나다 총리의 태도와는 극명하게 비교되며 섭섭한 마음이 가득하다.
우리의 검사 대통령은 위엄이 넘쳐서 그런 처신을 해도 나무랄 사람이 없으리라는 배짱에 그리도 태평스러웠던가? 또 그곳까지 따라간 기자들은 부인의 명품 쇼핑에 한 마디 기사도 낸 바 없으니, 그곳에 왜 갔는지? 대통령 전용기에 태워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났던가? 그래서야 기자라고 할 수 있을까? 엄혹한 일제 강점기 때 민족의 독립을 바라며 투쟁한 선배들의 빛나는 희생이 있었기에, 나는 오늘날 기자들의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면서도 착각할 때가 많다. 대통령, 장관, 도지사, 시장, 국회의원 등이 국민의 수난을 외면하면서도 오히려 떵떵거리며 큰소리치는 태도를 접할 때 힘없는 민초들은 기죽는다. 긴 세월 동안 ‘경제성장,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향해 개인의 복락과 목숨까지 걸고 투쟁하던 한국인의 의기義氣와 민도民度가 언제 저렇게 타락했나?’ 싶어서 퍽 낯설다.
웬 무속인들은 그리도 설쳐대는지. 평균 학력이 가장 높다는 나라에서, 또한 21세기에 들어서도 기독교를 가장 열렬히 믿는 나라에서 당장 버려야 할 두 가지를 꼽으라면, 나는 점쟁이 찾는 일과 보신탕 문화를 들겠다.
그런데 대선 후보의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를 그려놓던 일, 대통령 관저의 교체, 군사 시설의 급작스러운 연쇄 이전, 요새화된 청와대 시설을 버리고 몇조 원이 들지 알 수도 없고 알려주지도 않는 꿍꿍이를 부리면서, 그 거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공금의 셈법을 흐리는 수법 등은, 이곳 동포 사회의 어떤 단체가 하는 짓과 많이 닮았다.
공금의 회계처리가 스스로 생각해도 떳떳하지 못하니까, 아예 발표하지 않는다. 말썽을 일으킨 그런 태도를 종종 되풀이하는 것은 ‘인간의 천성은 바뀌지 않나 보다’라는 확신이 들게 한다. 짝눈이라는 핑계로 군대에도 가지 않은 윤 대통령과 안보실의 1차장 등이 국가의 안보를 진두지휘하며 전쟁을 부추기는 것은 위태위태한 코미디를 보는 듯하다. 안보 시설의 연쇄 이전 공사는 또 누가 맡아서 할 건지?
최근에는 대통령의 처가 일족이 양평 고속도로 게이트로 한창 시끄럽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더니 이를 두고 하는 소린가? 어쨌거나 그들이 권병權柄을 쥐고 있으니 내려올 때까지 전쟁이나 일으키지 말기를 빈다. 전쟁에서 죽고 다치는 것은 대개 힘없는 민초들이요, 권세와 돈을 많이 가진 자들과는 상관이 적은 일임은 경험으로 잘 안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30여%로서, 22개 주요국 지도자들의 인기 순위에서도 꼴찌를 벗어난 적이 없는 이런 사람을 왜 뽑았는지 좀 물어보자. 그대는 지금도 그를 옳은 지도자로서 믿고, 지지하는가? 지난해 무슨 마음으로 그리했으며, 이제는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성과 학식이 있는 인간이라면 어떤 중요한 일을 행함에 논리나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지난 해 그대의 판단이 잘못이었음을 이제 깨달았다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새로운 안목으로 바른 판단을 할 수는 있다. 그게 인간의 모습이다.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뭉개고 입을 다무는 행위는 거짓되고 비겁하며, 교양인의 태도로서는 낙제점이다.
지금 한국호라는 배가 산으로 가고 있는데, 순항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재인 때문에 그렇다고? 이재명 때문에 그렇다고? 아서라! 그런 무식한 궤변을 늘어놓는 것에도 이젠 신물이 난다. 子曰 人之有道 暖衣飽食 逸居而無敎 卽近於禽獸 (맹자의 말씀이다. 사람에겐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이 있나니, 따뜻하게 입고 잘 먹어 편히 지내면서 교육이 없으면, 곧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되나니…)라는 성인의 교육 지침이 귀청을 때린다.
그렇다. 인간은 인간다운 말을 하고 인간다운 행동을 할 때 인간이다. (202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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