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을 위한 건축과 주거환경)
필자가 지난 주 나열했던 질문들에 여러분들은 어떠한 답을 하였을까?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흑백논리적인 것이었기에 당연히 부자로 살고 싶고, 좋은 차를 타고 싶고, 자녀가 똑똑했으면 좋겠고, 좋은 대학을 나오고 질 좋은 삶을 살아가게 하고 싶은 답을 택하였을 거라 확신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인 것이다. 일부러 고행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면 어떤 누가 힘들고 가난한 것을 원하겠는가?
인간은 원래 욕구/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처음에는 생존을 하기 위해 먹고 자는 생리적인 욕구를 갈망한다. 생리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그 다음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안정을 갖고 싶은 안전의 욕구가 생긴다. 이때 재물이나 재산을 모으는 등의 행위를 하면서 불확실한 미래에 안정된 삶을 가져가려고 하는 본능인 것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 채워지게 되면, 그 다음은 애정 그리고 공감을 가지려는 욕구를 해소하고 싶어진다. 본인이 살고 있는 공간 내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또는 이성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충족되는 욕구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런 상호관계 안에서 자신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존경의 욕구가 나타나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욕구로 발현된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3대 욕구는 식욕, 성욕, 수면욕으로 제일 아래 단계인 생리적인 욕구에 들어가는데 식욕과 수면욕은 배고프거나 졸리면 생리적인 표현이 드러나면서 해결이 되지 않으면 결국 죽게 된다. 성욕은 이성을 만났을 때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며 느닷없이 시도 때도 없이 발현될 수 있지만 또한 지금 바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닌 본인의 의지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욕구라 좀 특이하다.
인간은 누구나 쾌적한 환경에서 있고 싶고,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은 게으르지만 늘어지게 편안해지고 싶어하는 욕구 그리고 원하는 것을 좀더 많이 가지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좋은 것, 예쁜 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소유의 욕구와 성적인 요구들이 이러한 욕구/욕망이 없었다면 이미 인간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종교는 이런 인간의 욕구/욕망을 누르고 제한하는 계명이나 규율을 강조해 왔기에 남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는 죄를 짓고 있다는 압박을 가하고 그 죄에서 벗어나려면 가진 것을 힘없고 못사는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어주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잘 살고 싶은데 잘 살면 안 되고, 많이 가지고 싶은데 많이 가지면 안 되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려고 한다.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중고등동물들에게는 생명보전, 종족유지와 번식을 위해 욕심을 갖도록 신께서 프로그래밍을 해놓으셨고 생각을 할 줄 모르는 곤충 또는 하등동물은 생명보전과 종족유지, 번식을 위해 호르몬 또는 생화학적 작용에 의해 외부환경에 반응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을 해놓으셨기에 이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고 본다.
다만 인간은 단순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 언어를 가지고 이성적인 사고와 인지작용을 통하여 나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더 넓은 다른 모든 사물과 동식물에 관여를 하고 주변환경을 능동적으로 바꿀 수 있기에 양심, 도덕, 종교적 율법이나 규율, 사회적인 규율,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지 않으면 통제가 되지 않는다면 종말을 맞이 할 수 있는 위험도 가지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자라게 되고 자신만의 가치관과 자아가 형성되면서 동시에 옳고 그름의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생활을 하게 되지만 가치관과 자아가 완전하게 형성이 되지 않는 어린 시기에도 주위의 환경에 영향에 따라 양심이라는 것이 생긴다. 우리 인간들 모두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본인들 만의 법을 만들어 놓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행동하면서 살게 된다.
하루를 살면서 나는 얼마나 양심의 가책 느끼며 사는지 한번 생각해보라. 그것이 관습이든 아니면 종교적 신념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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