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암스트롱의 지시에 의해 9월15일 햄프턴군과 합동작전을 위해 진군하기로 한 윌킨슨은 9월2일 조오지 요새(현 나이아가라 온더 레이크)의 잔 파커 보이드 준장을 만나 보이드의 사단병력을 새키츠항으로 진군하여 자신이 이끄는 군대와 함께 햄프턴군과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윌킨슨은 조오지 요새에서 병가로 한 달을 머물러 암스트롱의 작전계획을 지연시키고, 10월초에나 보이드병력과 함께 새키츠항으로 돌아왔다.
크라이슬러 농장 전투
10월 17일 8천여 명의 윌킨슨군은 300대의 소형 나룻배를 타고 캐나다 천섬을 향했다. 영해군과 소접전을 벌리며 진군하던 윌킨슨은 11월 6일 햄프턴의 퇴각소식을 접하고 즉시 온타리오주 콘월로 군을 회동하라고 햄프턴에게 지시했다.
11월 10일 윌킨슨은 온타리오주 모리스타운 근처 쿡스주막에 작전 본부를 세우고 숲을 배경으로 임시 텐트로 진영을 구축했다.
한편 프란시스 드 로텐버그소장은 미군이 계획했던 킹스턴 공격을 방위하기 위해 영군을 킹스턴으로 대거 이동시켰다. 11월 5일 미군이 작전을 변경하여 천섬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받은 드 로텐버그는 7일 조셉 워튼 모리슨 중령을 선봉으로 영군 650명이 킹스턴에서 출격하여 미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미 해군을 피하며 추격 중인 모리슨은 250명의 군을 추가하여 900명을 이끌고 10일 보이드군의 후미에서 3KM 떨어진 크라이슬러농장에 다음날 공격을 위한 진을 쳤다.
윌킨슨은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전투함에서 머물며 미군 4,000명의 총지휘를 2인자인 모건 루이스 준장에게 맡기려 했으나 그도 몸이 불편하다고 하여 보이드 준장에게 일임했다.
찬비가 내리는 1813년 11월 11일 영해군의 포격이 시작되었고 모학 원주민 전사들과 캐난다 의병군이 영군에 합세하였다. 모리슨은 영함대의 엄호포격 하에 원주민전사와 퀘벡의 벌티쉐군의 게릴라전으로 미군을 공격하게 하고 영 정규군은 좌우 중앙으로 나누어 미군을 향해 진격하였다.
좌우 행군은 2대 행렬로 나누어 행군을 길게 만들어 적은 수의 영군으로 숫자가 많은 미군을 포위하게 만들었다. 오후 2시경 미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후퇴하는 영군을 1마일 이상 추격했다가 잠복했던 영군 왼쪽 행렬의 공격을 받고 미군은 숲 속으로 피해 재공격을 시도했으나 무질서하게 탄약을 소비하여 영군의 공격에 맞서지 못하고 후퇴를 해야 했다.
뒤늦게 보이드는 미 포병대를 배치하여 포격으로 영군에 타격을 가했지만 훈련이 잘되고 전투력이 강한 모리슨의 영군은 많은 사상자를 무릎쓰고 미 포병대를 공격하여 포를 빼앗았다.
전투 중 두 지휘관의 총격사망으로 오합지졸이 된 미군은 보이드의 명령으로 후퇴를 계속했다. 다행히 오후 폭설이 내리면서 4시쯤 어둠이 찾아오게 되어 전투는 중단되었다. 이 전투로 영군은 192명 미군은 36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12일 윌킨슨은 콘월 북쪽 5 KM 지점으로 후퇴하여 햄프턴의 증원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햄프턴이 식량과 군보급품이 고갈되어 플랏츠버그로 돌아갈수 밖에 없다는 보고를 받은 윌킨슨은 작전회의를 열고 몬트리얼 함락을 위한 영국과의 전투를 포기하고 플라츠버그로 후퇴했다.
후에 윌킨슨은 군법에 회부되었지만 무죄로 석방되었다. 반면에 모리슨은 우수한 전투능력을 인정받아 영국장성으로 진급되었다.
1895년 캐나다의용군 방위국은 크라이슬러농장 전투지역에 전투기념탑을 세우고, 1921년 캐나다정부는 모리스 타운에 이 기념탑을 옮기고 캐나다국립역사지역으로 지정했다.
난공불락의 퀘벡 캐나다
샤터게이 전투와 크라이슬러농장 전투를 세인트 로렌스 전쟁이라고 부른다. 무능한 햄프턴과 윌킨슨의 공통점은 목숨을 걸고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군인정신이 결핍되어있고, 정보수집에 취약하고, 작전계획이 빈약하여 지휘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도력이 없어 군기를 잡지 못하고, 전진보다 후퇴를 하는 것이었다.
숫자적으로 영군보다 10배 이상 우세했지만 미군은 전투도 제대로 하지 않고 후퇴를 한 무능한 두 장성들로 인해 난공불락의 역사를 유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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