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지 워싱턴(3)
(지난 809호에 이어)
미 연합군 총사령관
1775년 미연합국 총사령관이 된 워싱턴은 군사에 관한 책 다섯 권을 통독하고 향후 8년간 항상 솔선수범으로 총사령관 리더쉽을 보여줬다. 트렌튼 전투 공격시 델라웨어강 도강에는 선두에서, 롱 아일랜드전투 후퇴시 이스트 리버 도강에는 마지막 배를 타고 지휘하였다.
워싱턴 부하들이 공포에 질려 후퇴할 때에 워싱턴은 적군 깊숙이 들어가서 지휘를 하여 그린장군을 비롯한 부관들이 워싱턴의 말고삐를 잡아 끌어와야 했다. 영국군은 80야드도 안 되는 사정거리 안에서 말을 타고 움직이는 워싱턴에게 사격을 멈추고 멍하니 쳐다보던지 정조준을 못하고 사격을 하였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연합군의 충성심과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밸리 포지
트렌튼 전투와 새라토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워싱턴은 브랜디 와인 크릭전투와 맨머쓰 전투와 저먼타운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필라델피아를 영국군에 내주고 20마일 떨어진 곳에 고지로 알려진 밸리 포지에 진지를 만들고 1777년 겨울을 지내야 했다.
영국군도 새라토가 전투에서 버고인과 영국군 6천여 명이 포로가 되어 겨울이 지날 때까지 휴전상태를 유지했다. 워싱턴이 보강해준 아놀드군과 해밀턴군의 힘을 합하여 새라토가 전투에 승리한 게이트 장군은 이기심 때문에 워싱턴 총사령관을 건너뛰어 상원에 직접 보고하여 군기를 문란하게 하였다. 화가 난 워싱턴이 사임서를 제출하자 상원은 받아드리지 않았다.
1777년 12월부터 1778년 6월까지 워싱턴이 이끄는 1만2천명의 미연합군은 식량과 의료 및 물품을 보급받지 못하여 영양실조와 비위생 시설에 의해 이가 들끓어 티프테리아 장질부사 이질, 결핵 등으로 2천명 이상이 사망했다.
허기진 일부 군인은 가죽장화를 불려 삶아 먹을 정도였다. 밀가루 반죽을 불에 달군 바위에 구운 케이크로 연명했다. 군 봉급을 늦게나마 받으면 인플레로 종이조각같이 되어 고향에 남긴 가족들 생계문제가 되었다.
이에 군 반란까지 일어났지만 엄격한 군율을 지키기 위해 주모자를 처형할 때에 워싱턴은 눈물을 감추어야 했다. 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스튜벤 독일 군교관으로 하여금 유럽식 전투를 연방군에 교육시켜 1781년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미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등급 된 트럼프도 2019년 독립기념일에 밸리 포지 역사를 연설하며 미국은 불패의 국가라고 국민에게 상기시켜 애국심을 고취 시켰다.
미합중국 헌법제정 위원장
1787년 워싱턴은 헌법제정위원회에서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원래 프랭클린을 추대하려 했지만 건강악화로 프랭클린은 워싱턴에게 양보했다. 프랭클린은 펜실베니아 대표로 연합정관을 참고하여 미 연방헌법을 재정하게 도와주고 워싱턴은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위원들의 의견을 받아드려 필요에 따라 수정 할 수 있게 미합중국 헌법을 통과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미 초대 대통령
1779년 100%의 지지율로 미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워싱턴은 존 아담스 부통령, 벤자민 프랭클린 국무장관, 알렉샌더 해밀턴 재무장관을 중심으로 내각을 세우고 4월 30일 행정부를 이끄는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연방 사법부를 세우고 헌법에 의하여 상-하원과 함께 각부처간 세력균형을 유지하였다.
미 국민의 자유 평등을 위한 자유헌장수정법을 만들었고, 1790년 재산소유에 관계없이 모든 백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을 통과 시켰다. 사업가들로 하여금 산업을 일으키게 하고 그들이 부담하는 세금으로 국가 세입을 올렸다.
1791년 연방 부채를 해결하기 위하여 해밀턴이 제안한 연방은행을 설립했고 1792년 달러를 찍어 국채를 발행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길을 열어 세계를 이끌어 가는 미합중국의 초석을 만들었다.
군대를 만들어 연방정부 대통령이 군을 통치하게 하였다. 1793년 100%의 지지율로 재선된 후 유럽제국의 투쟁에 중간입장을 지키는 법을 세웠고 1794년에는 미 해군을 창설 하였다.
또한 영국과 제이조약을 맺어 평화 화친을 이뤘다. 미 독립전쟁시에는 프랑스 루이 16세의 큰 도움을 받았지만 프랑스 혁명으로 루이16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세계 최강국이 되는 대영제국과 손을 잡아야 하는 현실적인 결정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친 프랑스파인 공화당의 토마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과 항상 정적이 되었다. 무소속인 워싱턴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연방주의와 뜻을 같이 했지만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았다. 평화는 부국강병에 의해 유지되고, 자유는 투쟁을 통해 유지되고, 동맹은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냉철하게 결정된다는 사실을 워싱턴이 미 국민에게 확인시키는 교훈을 남겼다.
그는 군 통솔뿐 아니라 행정에도 능력을 발휘했다. 새로운 법을 통과할 때마다 그는 부서 장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논쟁에 침묵을 지키고 그들이 워싱턴의 의향을 감지하게 유도하여 마지막 결정을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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