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지 못한 결혼(1819)
1818년 27세의 뷰캐넌은 랭카스터 무도회에서 철강부호로 알려진 라버트 콜맨의 22세 된 딸 앤 캐럴린을 소개받았다. 1796년 10월 18일 펜실바니아주 랭카스터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앤은 수줍어하였고 둘은 첫눈에 반해 1919년 약혼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주 만나야 할 때에 뷰캐넌은 1819년 공황으로 바빠지는 변호사업으로 몇 주에 한번 만나게 되어 주위 사람들은 뷰캐넌이 다른 여자들과 만난다느니 뷰캐넌은 진정한 사랑보다 앤의 재산에 관심이 있다느니 하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민감한 앤은 뷰캐넌에게 편지로 뜬소문 소식을 알리고 다툼 끝에 앤은 파혼하고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 친척집으로 갔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12월 9일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했다. 임종을 지켜보던 챕맨 의사는 히스테릭한 쇼크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앤은 아편이 들어간 처방약 섭취로 사망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앤의 죽음을 슬퍼하며 뷰캐넌은 ‘세상에 오직 하나인 나의 사랑이 나를 버리고 떠나니 세상이 나를 버렸네, 나의 행복은 영원히 앤과 함께 무덤에서 지내리’라는 애타는 심정을 표현했다.
앤 부친은 뷰캐넌의 앤 장례식 참석을 거부했다. 콜맨가족은 뷰캐넌 때문에 앤이 죽었다고 비난하였고 뷰캐넌은 그 후 앤을 그리워하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나 말 많은 미국 정계에서는 그가 윌리엄 루퍼스 킹 전 부통령과 동생연애를 했다느니, 무성애로 섹스에 감각이 없다느니, 포크스 대통령 미망인과 밀애를 했다느니 등등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퍼졌다.
대통령 취임식(1857)
1857년 3월 4일 독신으로 취임식에 선서한 뷰캐넌은 대통령 1임을 약속하고 미의회가 노예제도에 대한 입법을 삼가하게 하고 연방에 등록된 노예주와 반 노예주를 제외한 여러 지역은 노예제도를 지방 자치제 결정권으로 위임했다.
그리고 피어스 전직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도망자노예법을 시행하는 것은 미 헌법에 의한 개인 재산보호법에 따라 흑인노예를 가축과 같은 개인 재산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강조했다.
취임 후 백악관 예우접대는 고아로 자란 해리엣 레인 질녀에게 위임했다.
드레드 스캇 소송 케이스(1846-1857)
1799년경에 버지니아주에서 노예로 태어난 드레드 스캇은 1830년 미저리주 세인트 루이스에서 잔 에머슨 군의관에게 팔렸고 1836년 에머슨을 따라 위스칸슨 지역으로 이주하여 헤리엣 라빈슨과 결혼한 후 지역법에 의해 자유인이 되었다.
1843년 에머슨이 사망한 후 딸까지 둔 스캇 가족은 에머슨의 부인 이렌 에머슨 미망인의 노예취급을 받고 미망인은 스캇의 노임을 착취했다. 스캇은 돈을 주고 자신의 노예신분을 획득하려 했으나 미망인은 허락하지 않았다.
1846년 스캇은 세인트 루이스 법원에 이렌 에머슨을 고소하여 자유를 얻으려고 했으나 패소했고, 1847년 미저리주 대법원까지 갔으나 5년이 지나면서 1852년 패소했다.
1853년 스캇은 연방법원에 항소를 계속하여 1856년 연방대법원까지 판결이 올라갔다.
1857년 취임식을 바로 앞에 둔 뷰캐넌은 잔 캐트런과 라버트 쿠퍼 대법원 판사들에게 압력을 가해 취임식 이틀 후 1857년 3월 6일 라저 태니 대법원장이 이끄는 연방 대법원은 노예는 자유인이라도 미국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대법원의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없다며 7대2로 스캇 가족에게 노예유지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 헌정사상 가장 수치적이고 최악의 대법원 판결로 알려진 역사적 희생이 되었다.
반 인륜적인 드레드 스캇 판결의 부당함을 느낀 에이브러햄 링컨은 1858년 9월 일리노이 연설에서 미래의 판결은 국민이 결정할 것이라고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대법원 판결을 예상했다.
1957년 공황(1857-1861)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1848-1855)로 미 서부개척이 활성화되어 금과 호환성 있는 지폐가 남발되고 철도사업이 절정에 이르렀으나 금이 고갈되면서 은행들이 긴장을 하게 되었다.
1857년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드레드 스캇 판결을 결정한 태니 대법원장이 미저리 협정이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36.5도 이북의 반 노예주들의 서부개척이 움츠러들고 철도회사 주식이 폭락하면서 뱅크런으로 이어져 140개의 주 은행들이 문을 닫고 5000개의 사업체들이 파산을 하여 실업률이 올라가 미국은 공황을 맞게 되었다.
공황 소식은 1844년 새뮤얼 모스 전보에 의해 미 전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1859년 공황이 평준화되면서 뷰캐넌은 주은행들이 지폐보다 금전이나 은전 거래하기를 종용하고 금화와 지폐를 3:1의 가치비율로 정해 지폐 남발을 방지했다.
1861년까지 공황의 여파가 지속되면서 공업경영의 타격을 받은 북부와 농업으로 타격을 덜 받은 남부와 적대의 골이 깊어졌다.
유타 분쟁(1857-1858)
1857년 5월 뷰캐넌은 유타 지역에 몰몬교라고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와 일반 개척자들과의 분쟁을 진압할 목적으로 무장한 미 육군 탐험대를 보냈다. 몰몬교단은 브리겜 영 전 주지사가 이끌고 있었다.
1857년 9월 몰몬교단은 새로 영입되는 개척자들 중 몰몬교의 초대지도자를 살해했다는 루머를 듣고 대량 살상을 감행했고 미군은 이에 따라 몰몬교단에 공격을 시작했다.
몰몬 교단은 무장을 하고 솔트 레이크 호수에 대치하며 전면적인 전투를 피하고 미군의 보급망을 차단했다.
미 육군은 월동준비가 되지 않아 일단 후퇴를 하고 이듬해 1858년 뷰캐넌은 평화적인 타협을 통해 대량 학살한 주범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주지사를 유타 지역에 보내 통치하게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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