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이후로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삼상 18:6-9)
엘라 골짜기에서 40일 동안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는 동안 사울과 이스라엘 병사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어야 했으며, 백성들도 불안 속에서 전쟁의 결과를 지켜보아야 했다. 블레셋을 물리치지 못하면 이스라엘은 그들의 압박과 핍박을 받으며 허덕이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혜성처럼 나타난 무명의 목동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적의 장수 골리앗을 죽임으로 이스라엘은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울은 다윗을 그의 곁에 머무르게 하고 천부장과 기타 여러 가지 중요한 임무를 주어 그를 보좌하도록 했다. 다윗은 사울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모든 임무를 효과적으로 또 성공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에 그가 속한 베냐민 지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그를 높이며 그의 능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사울을 보좌하는 사람들도 날로 높아가는 다윗의 범민족적 인기에 대해 경계하거나 시기하는 대신 그의 재능과 달란트를 인정하며 지지하게 되었다. 그들 중 다윗의 능력과 재능과 믿음을 누구보다 신뢰하며 그를 자기 생명처럼 사람은 사울의 장남 요나단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요나단은 다윗의 출현을 가장 경계하며 그의 인지도가 높아갈수록 그의 일거일동을 주시하며, 그를 시기하여야 할 입장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백성들 사이에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고 사울의 신하들이 그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요나단의 몫인 차기 이스라엘의 왕권이 그를 떠나 다윗에게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의리와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다윗이 그의 아버지 사울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요나단의 의리와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기만 하다.
사울도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 그의 앞에 섰을 때 다윗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자기 곁에 두고 중요한 임무들을 부여했다. 그러던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그를 제거할 마음까지 먹기 시작한 것은 그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올 때였다. 수많은 백성들이 모든 성읍에서 나와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사울의 군대를 환영하면서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 노래한다. 그 노래 소리를 듣고 사울은 대단히 불쾌해졌다. 그가 죽인 적군은 수천 명인데,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며 백성들이 이스라엘군의 총사령관인 그보다 일개 목동인 다윗을 높인다고 여겼던 것이다. 사울은 “이러다가는 저들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 날부터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인들의 노래를 들으며 사울이 범한 결정적인 과오가 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 그것이다. 그 노래의 의미는 사울이 죽인 적군은 불과 수천 명인데,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는 뜻이 아니라 “천천이요, 만만이라”는 표현은 “수천 명과 수만 명”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수”를 표현하는 것인 것이다. 시편 91편 7절과 미가서 6장 7절을 살펴보면 이 사실은 자명해 진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91:7)에서의 천 명과 만 명은 실제로 천 명, 만 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네 주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도 너는 안전할 것이다”를 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을 기뻐하실까?”(미 6:7)에서의 천천이나 만만도 숫자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수양이나 강물처럼 많은 감람기름을 가지고 나온다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겠느냐?‘는 뜻인 것이다.
따라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는 사울과 다윗이 수많은 적군을 죽였다는 뜻이며, 사울의 이름을 먼저 부른 것을 보면 백성들은 블레셋을 격파한 이스라엘의 영웅은 사울 왕이며, 다윗은 그의 휘하 장병으로서 적은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노래하며 승전한 이스라엘군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40일 간이나 골리앗의 도전에 응하지 못하고 피하다 다윗이 그를 죽임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 때문에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중 여인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자기의 입장에서 그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높인다고 잘못 이해하고 다윗을 미워하며 정적으로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울의 마음에 다윗을 향한 질투와 증오가 쌓이면서 그는 악령에 시달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셨을 때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었다.(삼상 10:10)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버림받고, 다윗을 미워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자 악령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다윗이 수금을 타주면 악령이 그를 떠나곤 했다.(삼상 16:14-24) 사울의 다윗에 대한 질투가 심해지면서 악령이 더욱 그를 괴롭히게 된 어느 날, 다윗이 수금을 타며 그를 위로하고 있는 중에 사울이 들고 있던 창을 다윗을 향해 던졌다. 다윗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이 던지는 창을 피했다.(삼상 10:10-11)
다윗을 죽이려는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자 사울은 그의 맏딸 메랍을 아내로 주겠다고 다윗에게 제의한다. 다윗을 사위로 삼은 후 그를 전쟁터에 내보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죽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윗은 비천한 집안의 아들이 어떻게 왕의 사위가 되겠느냐며 사양한다. 그러자 사울은 메랍을 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주었다. 이 일 후에 사울의 또 하나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사울은 크게 기뻐한다. 미갈을 다윗에게 주고 그녀를 이용하여 그를 함정에 빠뜨려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다윗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그가 어찌 왕의 딸을 아내로 삼겠냐며 물러선다. 사울은 자기는 아무런 예물도 바라지 않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사람의 포피 100개를 원할 뿐이라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은 다윗을 죽이되 블레셋의 손을 빌려 그 목적을 달성하기를 원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부하들을 데리고 나가 블레셋 사람 200명을 죽여 그들의 포피를 잘라 왕에게 바치자 사울은 다윗에게 미갈을 아내로 주었다. 미갈은 다윗을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그녀의 다윗을 향한 사랑은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처럼 크고도 뜨거웠다. 그들 둘은 다윗을 아버지 사울보다 더 아끼고 사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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