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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억 칼럼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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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크리스마스

 


“사라, 무엇을 생각하고 있니?” 16층 아파트 창문 앞에 서서 내가 다가가고 있는 것도 모르고 무엇엔가 골몰해 있는 12살 막내딸에게 물었다. 
“아빠, 금년이 내 생애 중 제일 슬픈 성탄절이 될 것 같아.” 돌아서지도 않고 하는 딸애의 엉뚱한 대답에 당황하며 “어째서 그런 말을 하니?”라 되물었다. “아빠는 내게 아무 선물도 사 줄 수 없잖아.” 돌아서서 나를 쳐다보는 사라의 크고 동그란 두 눈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사라가 며칠째 웃음을 잃고 우울해 하던 까닭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서 가슴을 찌르는 아픔이 느껴졌다. 매년 이맘때쯤에는 응접실에 커다란 성탄나무를 세우고 그 밑에 아이들을 위한 성탄 선물상자들을 쌓아놓곤 했었다. 성탄전야에 선물 하나하나를 뜯으며 즐거워하는 사라를 위해서는 벤이나 진아 보다 많은 선물상자들을 준비해 주었다. 자기 선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상자를 들어보기도 하고, 흔들어 보기도 하며 성탄전야를 기다리던 사라였다.

 

한 해 전만해도 예쁘게 장식한 성탄나무 아래 세 아이를 위한 선물상자들을 쌓아두었고, 사라는 매일매일 늘어가는 선물상자들을 세며 기뻐했었다. 
하지만 그 해엔 40이 넘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고 개척교회를 시작했기에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이들을 위한 성탄절을 준비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12월 중순이 되었어도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할 수 없었음은 물론 집안에 아무런 성탄장식도 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도 막내딸의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때 난 참으로 부끄럽고 무책임한 아버지였다. 

 

1991년 나의 어린 딸 사라가 선물 없이 맞아야 할 성탄절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을 보며 난 괴로웠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사라가 보낸 그 해의 성탄절은 결코 “슬픈 크리스마스”가 아니었다. 갖가지 장식으로 반짝이는 성탄나무 아래 쌓이는 선물상자의 숫자가 많으면 기쁜 성탄절이고, 그렇지 못하면 슬픈 크리스마스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릴 의무와 권리를 부여 받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가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하고 복된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보금자리 에덴동산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들에게 생명과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반역의 깃발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품을 떠났기 때문에 슬픔과 고통의 길을 방황하다 끝내는 멸망하고 말 인간들을 하나님은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그에 대한 도전을 포기하고, 죄의 길을 버리고 그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고 권면하며, 경고하고 명령하기까지 하셨다. 
우매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의 호소와 권면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허황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죄악의 길을 계속하여 걸어갔다. 죄의 늪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그 곳에서 나올 생각조차 안 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바라보시던 하나님께서는 멸망의 길을 가는 그들에게 영생의 길을 허락하시기 위해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로서 “하나님과 본체시기에 하나님과 동등하시면서도”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아낌없이 버리시고 하늘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고난과 멸시의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셔야만 인간들이 받을 수 있는 “구원”이란 그 무엇보다 귀한 값진 선물을 지니고 세상에 오신 날이 성탄절이다. 이 같은 성탄절의 의미를 깨닫는 다면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구원”이란 선물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 깊이 맞아드려야 하고. 하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오신 예수님을 어둡고 추운 밖에 세워둔 채 먹고 마시고 즐기며 "Merry Christmas"를 교환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조국을 떠나기 전에 들었으니 반백 년도 더 된 일이다. 어느 해 성탄전야가 “광란의 밤”이 되어버렸으며, 그 밤 어둠침침한 조명 속에서 색정적인 음악에 맞춰 춤추던 젊은 여인이 명동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남자에게 속삭였다고 한다. “교회에서도 크리스마스를 지키나 보죠?”라고 말이다. 이들은 그들에게 영생이란 선물을 주기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낸 하나님과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슬프게 하는 무서운 죄악을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모셔 들이지 않고 맞이하는 성탄절은 무의미하다. 주님이 들어오실 방을 마련하지 않고 12월 25일을 기다리는 이들이야 말로 슬픈 성탄절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부모형제와 친척들 그리고 이웃사람들 사이에 높고 두터운 담을 쌓은 채 교환하는 성탄 카드와 선물은 성탄절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을 아프게 할 뿐이다. 진정 기쁘고 의미 있고 보람된 성탄절을 오신 예수님을 가슴 깊이 모셔 들이는 사람들의 것이다. 
눈물 고인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아빠, 금년엔 참으로 슬픈 크리스마스를 맞아야 할 것 같아”라고 울먹이던 사라를 위해 난 기도했었다. “하나님 아버지, 다가오는 12월 25일이 자기에게 슬픈 성탄절이 되리라 생각하는 사라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 원합니다. 사라가 진정 기쁘고 즐거운 성탄절을 맞이하려면 가슴 깊은 곳에 아기 예수께서 누울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 속이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너무도 많이 변했다. 전 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코로나로 인해 생활양식이 완전히 변했는가 하면 국제관계는 더욱 복잡해졌고,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갈등은 곧 지구촌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런 시기이기 때문에 금년에는 슬픈 성탄절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 믿는다. 이런 때이기 때문에 캄캄한 밤하늘을 광명으로 물 드리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는 천사들의 찬송소리 속에 오신 아기 예수를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모셔 들인다면 금년의 성탄절엔 하나님의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성탄절에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합심하여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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