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난 사람들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창세기 27장38절).

아브라함의 손자, 이삭의 장남, 에서의 애처로운 비명이요, 울음이다. 쌍둥이 동생 야곱이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자신이 받을 복을 가로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36절).

 

창세기 27장 첫머리에서 이삭은 장자 에서를 따로 불렀다. 그리고는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고 말했다.

이것을 엿들은 어머니 리브가는 큰 아들 에서 대신 둘째 야곱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그러나 야곱은 나이가 많아 눈까지 먼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또한 자칫 아버지께 들키는 날에는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리브가는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라고 말했다.

 

리브가가 자신 있게 “저주는 내가 받겠다”고 나선 것은 앞선 창세기 25장 때문이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절)고 하셨다.

 

그러니 에서가 분노한 것은 번짓수를 잘못 짚은 것이었다. 그 ‘장자의 명분’과 ‘이삭의 축복’은 야곱에게 돌아가기로 애초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에서 입장에서 억울할 수는 있다. 그는 아버지 이삭이 시키는 대로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사냥하여 아버지께서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어 가져갔다. 아버지께 순종하고, 말씀을 열심히 지켰다. 아들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에서의 착한 행동도 장자의 복을 받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에서의 에피소드는 마치 예수께서 들려주셨던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혼인 잔칫날 버림받은 다섯 처녀도 신랑을 기다렸다. 모자란 기름을 사기 위해 한밤중에 헐레벌떡 달려나가는 열심도 있었다. 심지어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소서’ 하고 신랑에게 간절히 매달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매몰찬 신랑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거절했다.

 

아버지 이삭은 큰 아들인 에서에게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라고 말했다. 기대했던 복은커녕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들은 것이다.

에서와 야곱의 에피소드를 통해 성경은 인간들이 내놓는 행위의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렇게 억울할 만한 사람은 성경에 또 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다. 비록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데리고 있던 애굽 출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태어난 자식이지만, 이스마엘도 엄연히 아브라함의 핏줄을 이어받았다.

창세기 17장에는 할례언약이 등장하는데,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언약의 증표로 요구하신 것이 할례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0~14절)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할례가 시행되는데,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라고 성경은 기록했다.

 

분명 이스마엘도 여호와의 언약에 따라 할례를 시행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동생 이삭이 태어난 이후 어머니 하갈과 함께 집을 떠나야 했다. 할례를 통해 여호와의 언약이 육체에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으나,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고도 언약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요구했다.

 

바울 사도는 이스마엘과 하갈, 사라와 이삭에 대한 이야기를 신약성경 갈라디아서에서 반복해 설명한다. 복음의 본질과 ‘다른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라디아서 5장6절)”고 쐐기를 박는다.

 

할례를 받았느냐, 아니냐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사람들의 종교적 노력과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기각 당하는 것이다. 유일하게 남는 것은 ‘사랑’이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라기 1장2~3절).

사랑의 출발점은 사람이 아니다. 에서가 여호와를 사랑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야곱이 형의 복을 가로챘느냐도 핵심포인트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말씀하시는 순간 모든 논란은 종결된다.

 

인격이나 됨됨이 등을 따진다면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여호와께서 늘 함께 하셨고, 광야에서 활 쏘는 자가 되었던’(21장20절) 이스마엘이 더 사내답고, 자신을 속였던 동생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에서가 더 통 크고 아량이 넓어 보인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양의 대신 죽음으로 살아난, 선택 받은 성도의 예표로 살았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가 대신 저주를 받겠다고 나서는 그 사랑 때문에 복을 받았다.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죄인들을 대신해 받아내셨던 그 이야기다. 야곱은 장자 에서의 옷, 에서의 냄새가 짙게 밴 그 옷을 입고 들어가 아버지의 복을 받았다. 또한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위한 별미의 재료로 죽임을 당한 염소새끼의 가죽을 뒤집어 쓴 채 아버지 앞에 나아갔다. 예수께서 내어주신 혼인잔치의 예복, 예수의 피로 씻은 의를 덧입고 성도가 여호와께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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