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곳곳에는 예수와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의 충돌이 그려진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 서기관 등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참소하며, 시비를 걸어왔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오매불망 기다렸던 그들이지만, 변방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목수였던 초라한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하고 예수께 말했다.
하지만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율법이 아니었다. 그저 유대교 스승인 장로들이 가르친 전통이며, 관습일 뿐이었다. 손을 씻을 때도 손가락, 손바닥뿐만 아니라 손목 위까지 씻으라고 계명처럼 강조했다.
마가는 이 부분을 보다 자세히 지적했는데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마가복음 7장 3~4절)”고 기록했다.
유대교의 선생이라 하는 자들이 인간들끼리 합의해 만든 규칙과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앞에 겁 없이 들이민 것이다. 그 이유는 사실 그들이 유대교 장로들의 가르침을 세세하게 지키는 행위를 통해 율법을 잘 따르고, 여호와 하나님을 지극 정성 예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도전에 “그러면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내게서 받으실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 사람은 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를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마태 15장3~9절)”고 공박하셨다.
그리고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으로 가득 찬 마음, 그것이 너희들의 실체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더러운 마음’은 애써 외면한 채 그것을 감추기 위한 술수로, 인간의 행위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위선이라는 말씀이다.
이런 장면을 모두 지켜보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새번역)” 하고 물었다. 분위기가 심히 살벌했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기가 심지 않으신 식물은 모두 뽑아 버리실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다. 눈 먼 사람이 눈 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 말씀은 앞서 마태복음 13장에 등장했던 가라지 비유의 현실판이다.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가만 두라’고 말씀하신다. 언제가 뽑을 날이 온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그저 2천년 전에 예수를 믿지 않던 유대사회에서 벌어졌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거룩하고 구원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곳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일이다. 다른 예를 찾을 것 없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대제사장이란 단어 대신 ‘나 자신’, ‘00교회’라는 이름을 넣고 읽으면 정확하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음에도, 나 자신의 유익과 공동체 조직의 유지를 위해 각종 전통과 규칙을 만들어 놓고, 성경구절까지 살짝 섞어 그것을 곡해하는 일들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채야 한다.
마태는 장로들의 전통을 둘러싼 논쟁 뒤에 곧바로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를 붙였다.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 이방인이었던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고, 보기에 딱했던지 제자들이 나서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 보내 주십시오(새번역)"하고 간청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라고 외면하셨다.
가나안 여인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계속 “도와 달라”고 매달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매몰차게 거절하셨다. 이방여인을 아예 개처럼 취급하신 것이다. 개는 고대 유대사회에서 가장 멸시 받는 존재를 지칭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에서 ‘개들을 삼가라’며 할례를 주장하는 악한 일꾼을 향해 ‘개’라는 단어를 동원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고 더욱 매달렸다. 마침내 예수께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대답하셨다.
가장 비천한 존재, 자신이 ‘개’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다.
그렇다면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가나안여인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나.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 오신 하나님 앞에서 “내 딸 살려달라”고 요구한 것은 면목 없는 일이다. 그 역시 자기 자신의 필요와 욕심, 소원을 이루는 데만 혈안이 돼 있는 모습이다. ‘개’의 역할이다.
시편 22편에서 다윗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나이까"라고 울부짖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와 같은 단말마의 비명이다. 다윗은 시편에서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라고 노래했다.
가나안여인은 자신이 ‘개’라는 것을 인정했다. 예수를 둘러싸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사람들 중에 자신이 있었고, 망치를 들어 대못을 박고, 창으로 예수를 찔렀던 개들 가운데 자신이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예수의 생명을 갉아먹은 죄인의 자리로 주저 없이 내려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믿음은 가나안 여인이 생산한 것이 아니었다. 그 이방여인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였다. 그에게 믿음이 선물로 주어진 것은 순전히 예수의 피에 기반한 은혜 때문이다. 예수께서 ‘개’들은 절대 먹을 수 없는, 오직 자녀들에게만 허락된 빵을 던져주셨기 때문이다. 자신의 살과 피를 발라 ‘먹으라’고 건네주신 것이다.
여기서 은혜와 편애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율법 외에 세세한 규칙까지 정해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열심을 부렸던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용납 못할 편애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물어뜯은 개 맞습니다”라고 고백한 가나안여인 쪽에서 생각하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다.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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