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은 예수께서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제자들을 세워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신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다소 흐름이 어색해 보이는 세례 요한의 에피소드가 2~19절에 불쑥 끼어든다. 부자연스러워 보인다고 한 것은 11장20절 이후에 회개하지 않은 동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에 대한 심판, 그리고 12장으로 넘어가 안식일 논쟁 등 가르치시며 전도하는 장면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에피소드는 이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고, 십자가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귀한 복음을 담고 있다.
먼저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76~77절)”라고 예언했다. 천사 가브리엘이 방문했을 때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15절)”,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17절)”는 통보를 받았다.
요한을 임신하고 있던 어머니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를 만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42~43절)” 하고 말했다. 태중에 있던 예수님과 요한이 태어나는 의미와 그들이 할 일까지 모두 부모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란 말로 예수님을 소개했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11장10절에서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고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고 구약성경 말라기 3장을 인용해 세례 요한의 정체성과 사명을 확인해 주셨다. 덧붙여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2절)”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예수께 질문했다. 당시 감옥에 갇혀 있던 요한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고, 혈루병을 앓던 여자를 낫게 하시고, 심지어 죽은 소녀를 살리셨다. 맹인들이 보게 하시는 이적도 행하셨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5절)”고 답하셨다.
요한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대답으로 하신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절)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결국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에 대해 듣고, 더러는 직접 목격하고, 알고 있어도 실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수많은 기적을 직접 보고도 귀신 타령을 하거나, 예수를 죽일 궁리부터 했다.
요한이 어쩌면 우매해 보이는 질문을 했던 것은 인간들의 불가능함 때문이다. 성경에 예언된 선지자로 태어났으나, 그는 구약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의 임무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십자가의 불가피성, 그 누구도 예수의 죽음이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예수 때문에 실족할 운명이다. 심지어 선지자 세례 요한조차도 그런 장면을 남기고 있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를 보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간들은 실족의 길로 빠져든다. 실족의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장터의 아이들 비유를 통해 추가 설명을 하신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6~17절).
인간들의 특징이요, 본질에 대한 설명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하고 서두를 꺼내신 예수께서 ‘너희들은 절대 복음에 반응할 능력이 없다’고 못을 박으신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며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5절)”라고 하신 것은, 이런 취지다.
그것을 더 확실하게 해주는 대목이 연달아 풀이되는데,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18~19절)에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가 오고, 천지의 창조주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비유에 결론처럼 붙어 있는 것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고, 율법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유대인들이 소유했던 지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혜와 지식을 동원해 요한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귀신 들렸다’거나 ‘죄인의 친구’라는 등 품평을 했는데, 실상 그것은 헛다리를 짚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의 지혜는 그저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악마의 유혹에 빠진 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로…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이사야 5장 20~21절)”라는 구약의 예언이 인간들에게 그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이제 현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바로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에 대한 심판의 선언이다. 이들은 유대 북부지역에 있는 도시로, 예수께서 여러 기적과 권능을 베푸셨던 곳이다. 그럼에도 그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기적 자체가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는 게 명백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 따로 선택해 부르시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다.
여기에 개입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25절)”.
복음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외면한다. 여기서 ‘어린 아이’는 ‘말 못하는’ ‘미성숙한’이란 뜻을 담고 있다. 요한과 예수에 대해 일일이 품평을 하던 자들과 반대편에 서 있는 집단이다. 이런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가 전해진 것에 대해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하고 예수께서는 설명하신다.
그리고 이 모든 에피소드의 확인 도장을 찍는 것이 27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에 집약돼 있다.
죄인들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사장/편집인)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