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베드로전서 1장2절)
‘나는 누구인가’ 궁금했던 시기가 있었다. 신문사에 다니면서 시간을 쪼개 대학원에 진학, 상담심리를 공부하고, ‘자아발견을 위한 여행’이나 ‘긍정심리학’ 또 당시 한참 유행하던 MBTI관련 심리학책을 읽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통해 지식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는 게 쉽지 않았고, 조금 더 알았다고 한들 그것으로 삶을 바꾸기는 더 어려웠다.
사도 베드로는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첫머리에서 성도의 정체성을 한 문장에 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이다. 미리 아심, 헬라어 ‘프로그노시스’에 뿌리를 둔 단어다. 미리 앎, 선견, 이전에 한 결정, 결심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베드로의 설교를 기록하며 이 단어를 썼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사도행전 2장23절).
베드로에 따르면 성도라는 존재의 시작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있는데, 성경에 등장하는 ‘미리 아심’은 두 갈래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미리 아심’이 있다.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8장29절), “하나님의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11장2절) 등 반복하면서 ‘미리 아심’에 대한 강조를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미리 아심’도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언급한 ‘미리 아심’은 십자가에 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결정과 결심에 따른 것이란 설명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다. 사실 이 대목이 더 중요한데, 성도의 뿌리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서 출발해 십자가에서 완성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바울은 이것을 에베소서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장4절)라고 기록했다.
베드로는 ‘미리 아심’에서 한발 더 나가 성도의 정체성을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에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순종’은 경청하고,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유심히 살펴서 듣고, 그것에 전적으로 삶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심’이 필수요소로 등장한다.
더 풀이하면 죄인이 복음을 듣고 반응하는 것은, 인간의 어떤 자질이나 능력, 평소 갖고 있는 개인적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는 오로지 성령이라는 뜻이다. 죄인이 성도로 거듭나는 과정은 오직 성령의 일하심에서 발생한다는 것으로, 그런 과정 자체를 거룩이란 단어로 표현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곳은 에스겔 37장이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바짝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는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묻는다. 에스겔은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답했다.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대언하라고 말씀하신다. 에스겔의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고 선포했다. 그때 마른 뼈들이 살아나 큰 군대가 되었다.
바울은 이것을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로마서 6장 17~18절) 하고 설명했다. 혹 ‘마음으로 순종하여’라는 대목만 뚝 잘라 ‘인간이 순종하기로 결심한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싶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경이 보는 인간의 실존은 죄인, 바짝 마른 뼈에 불과하다.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 ‘생기가 들어감’에 힘입어 ‘순종, 복종’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불만은 여기서 터져 나온다. 그냥 처음부터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못 하게 하시고, 죄를 못 짓게 조치를 하셔서, 계속 에덴에서 살게 하셨다면 아무 문제가 없지 않았느냐는 볼멘소리다. 그런 항변은 오직 관심사가 ‘나’ 밖에 없기 때문에 나온다. 내가 겪는 불행이나 불안, 고통을 곱씹으며 여호와께 싹트는 반항심이다.
그런데 인간 입장에서는 아쉽겠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은 오로지 ‘예수’뿐이다.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아니 창세 전부터 영원까지, 오직 예수께서 영광을 받는 데만 목적이 있었다. 인간은 그 목적을 위해 창조된 존재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라는 표현을 썼다. 성도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생략 괄호를 치고 싶어한다. ‘택하심’이란 단어에만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다. ‘나는 택하심을 받았을까’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머리를 싸맨다.
성경의 무게는 ‘피 뿌림’에 있다. ‘택하심’은 ‘피 뿌림’에서 파생된 효과에 불과하다. 피 뿌림은 십자가를 담고 있다. 창세기 초반부터 무죄한 짐승의 죽음을 시작으로, 아벨, 노아, 아브라함, 유월절 등 모든 사건과 성도들의 삶에 ‘피 뿌림’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을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십자가를 읽어내는 것이 성경읽기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피 뿌림을 통한 택하심 속에 태어난 성도에게 주어진 것은 ‘은혜와 평강’이다.
은혜와 평강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은혜 때문에 평강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 지어다’라는 복을 받은 성도들에게 닥친 것은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베드로전서 1장6절)라는 현실이다. 성도에게 시험과 근심이 따라붙는 것이다.
멀리서 예를 찾을 것 없다. 바울과 베드로의 삶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복음을 이야기하다 감옥에 수시로 갇히고, 때로 거반 죽을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나아가 성도의 분투는 자기 자신 안에서 더 처절하게 벌어진다. 바로 성도를 거룩하게 하는 과정에 투입된 성령께서 하시는 일 때문이다.
“그(보혜사)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한복음 16장8~11절)
성도 안으로 침투한 성령께서는 죄, 의, 심판에 대해 책망하신다. 여기서 책망은 ‘꾸짖고, 훈계하고, 죄를 깨닫게 하심’을 말한다. 죄인의 실존을 처절하게 발가벗겨 내시는 작업이 계속된다.
역설적으로, 그 과정 안에서 성도는 ‘은혜와 평강’을 체험한다. 두 손 들고, 십자가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성도의 정체성이다. 그것을 실감할 때 찬송이 터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베드로전서 1장3절).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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