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하며 만난 고등학교 후배가 있었다. 연배는 7~8년 차이가 났지만 명문대를 졸업하고, 공기업에 취직을 한 젊은이였다.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게 기특해서 가끔 점심을 함께 했다.
하루는 그가 고민을 털어놓다가 눈물을 쏟았다. 사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가슴 찡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대학생활을 할 때부터 그는 학교 근처의 한 교회에 출석했다. 300~400명 가량 모이는 작지 않은 교회였다고 한다. 늦게 신학공부를 마친 중년의 부목사가 대학청년부 담당으로 부임을 했는데, 그는 수요설교도 맡았다. 메시지의 주제는 언제나 ‘예수와 십자가’였다. 새로 온 부목사의 설교가 은혜스럽다는 소문이 나면서 처음 한두 달은 수요예배 참석자가 늘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언제나 결론이 같은 설교였다. 죄를 지적하고, 그것을 덮는 십자가의 은혜를 이야기했다. 주인공은 언제나 예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교회의 장로 몇 사람이 부목사를 찾아가 ‘설교의 주제를 좀 다양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달라지는 게 없었다. 6개월도 안 돼 그 부목사는 수요설교에서 배제됐다. 1년도 지나지 않아 교회에서 쫓겨났다.
그 부목사를 따르던 대학생과 청년 몇 명이 교회를 개척하자고 따라 나섰다. 그러나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후배도 그런 과정 안에서 여러 이유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새로 개척했던 교회 운영도 쉽지 않자 고민을 하고 있었다.
구약 열왕기상 22장을 읽을 때면 한편의 영화 시나리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유다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이 아람에 빼앗긴 땅을 되찾기로 의기 투합했다. 여호사밧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모으고, 아람과 전쟁을 하면 이길 수 있는지 물었다. 선지자들은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하고 입을 모았다.
유다왕 여호사밧은 더 물어볼 만한 선지자가 있는지 찾았고, 아합은 “미가야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내게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한다”고 답했다. 어쨌든 미가야를 부르기로 한다.
그때 시드기야라는 선지자의 대표가 철로 뿔을 만들어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며 분위기를 잡았고, 나머지 선지자들도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하고 화답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신은 선지자들이 하나 같이 왕에게 좋은 말만 하니, 당신도 그렇게 하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겠다”며 거절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미가야는 아합왕을 만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하고 말했다. 원하는 대답, 듣고 싶은 좋은 말을 해준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합왕이 “진실을 말하라”며 짜증을 냈다. 미가야는 결국 아합이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는 불길한 말을 전했다.
하이라이트는 19~23절이다.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또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이 말을 들은 선지자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고 길길이 뛰었다.
시드기야를 비롯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도 영이 임하긴 했다. 단, 여호와께서 거짓을 전하는 영을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신 것이다. 인간들끼리 지지고 볶는 순간에,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도 보이지 않는 계획과 손길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거짓을 전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더 크고,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미가야는 오히려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여기서 성도들의 고난이 비롯된다.
사도행전 7장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고 꾸짖었다.
유대인들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고, 스데반이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는 돌을 들고 스데반을 쳐 죽였다.
미가야나 스데반의 삶은 예수를 그리는 모형이다.
요한복음 7장의 배경은 명절인 초막절이다. 예수님은 변방인 갈릴리에 주로 계시면서 예루살렘 근처로는 가지 않으셨다. 유대인들이 죽이려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형제들조차 예수를 믿지 않았다(5절)고 기록한다.
그런 형제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7절)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세상의 실체, 악을 발가벗기는 것이었다.
아합왕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악했다. 여호와께서 그를 꾀어 죽게 하시는 장면이 열왕기상 22장의 이야기다. 그 과정에 동원된 선지자가 미가야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감추고 있던 악을, 목숨을 담보로 들춰냈다. 조상 때부터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을 족족 잡아 죽였고, 예수마저 살해했으며, 심지어 입으로는 ‘말씀말씀’ 하면서 율법조차 지키지 않았다.
세상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 하신 일은 ‘세상의 일을 악하다’ 증언하고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일을 완성하고, 확증용 대못을 박은 게 십자가다. 십자가가 섰고, 예수께서 거기에 매달려 죽었다는 의미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선포다. 세상에는 저주와 심판만 남게 된 것이다.
성도는 그런 일을 객석에 앉아 영화 감상하듯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미가야와 스데반이 겪은 일을 이토록 자세히 성경에 기록한 이유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예수와 십자가’만 전했더니 교회에서 쫓겨났다고 하더라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런 과정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스데반이 목격했던 하늘이 열린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기쁨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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