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를 읽다 보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뜻’이다. 우선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배경을 말할 때 ‘뜻’이라는 단어를 끌어온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로마서 1장10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고린도전서 1장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고린도후서 1장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에베소서 1장1절).
이밖에 골로새서와 디모데후서의 첫 마디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도가 되었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한 성경은 바울 자신을 비롯해 모든 성도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과 뜻에 따라 이뤄진다는 점을 반복해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라디아서 1장4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 1장4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에베소서 1장11절).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로새서 1장9절).
신약성경에 ‘뜻’(헬라어 ‘델레마’)이란 단어는 60번 넘게 등장한다. ‘어떤 일에 대한 결정’, ‘교서’, ‘목적’, ‘선택’ 등의 의미를 품고 있다.
‘델레마’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처음 쓰인 곳은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장10절)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정이나, 하시려는 일의 목적, 또는 그분이 내린 선택 사항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의미다.
산상수훈의 끝자락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장21절)고 하셨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구절은 ‘정답’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응축된 산상수훈을 완벽하게 지키겠노라 결심한다. 실제로 말씀대로 살기 위해 단어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뼈를 깎는 노력을 한다.
사도 요한은 구원의 여정에 대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장12~13절)고 설명한다.
13절에는 ‘델레마토스’라는 단어가 2번 사용됐다. ‘육정’이라는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몸, 육체, 육신, 신체의 의지’가 그 하나이고 ‘하나님의 뜻’에 대척점으로 서 있는 ‘사람의 뜻’이 두 번째다.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라는 단어를 통해 인간이 생산한 ‘뜻’을 모조리 부정하려는 강조를 하고 있다.
마태복음 7장에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언급하셨으나,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 육체의 욕망에서 비롯된 열심은 철저히 배제된다. 즉 요한복음에서 기록했듯, 몸을 입은 인간의 결심이나 의지의 표현으로 나타난 행함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인간은 애초부터 없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사울이던 시절, 율법을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지키고, 자신이 이해한 성경지식을 동원해 스데반 집사를 이단으로 몰아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섰다. 사울 스스로는 그것이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사울의 행적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랬던 바울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 때문이었다고 반복해서 진술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행한 일은 스데반을 죽이고,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를 찾아가 눈을 멀게 만드시고, 만나 주셨을 때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게 됐던 것이다. 그것은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됐던, 바울이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졌던 시간표에 따라 이뤄졌던 일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살았던 존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유일하게 완벽하도록 행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요한복음 5장30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6장38~39절).
히브리서(10장9절)는 이것을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적었다.
하나님의 뜻을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것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 그것이 곧 예수께 맡겨진 영혼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내놓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심지어 회심한 이후에 행한 사역도 배설물에 포함된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에서 내놓은 모든 행실을 은혜로 덮어버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바라본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28절)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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