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이란 사건의 연속이다. 집에서, 직장에서, 학업의 현장에서, 교회를 포함해 각자 소속돼 있는 단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관계를 비롯해 휘몰아치는 사건 속에서 표류하다 보면 어느새 세월은 저만치 흘러가 있다.

성경 안에도 사건이 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사건의 무게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혼란은 점점 극단을 향해 치닫는다. 그 안에서 행간을 읽다 보면 수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인생사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 안에서 행동강령이나 삶의 지침을 배우려 하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뭔가 지혜를 찾아냈다고 한들, 그걸 완벽하게 실행에 옮길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다. 이미 인간의 실패를 전제로 성경의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여로보암(22년)-나답(2년)-바아사(24년)-엘라(2년)-시므리(7일)-오므리(12년)-아합(22년).

구약성경 열왕기상 15~16장에 등장하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이다.

어떤 사람이 BC 910년대 어간에 북이스라엘에서 태어나 60년쯤 살았다고 가정하면, 초대 왕 여로보암 말기에서 아합왕 시대까지 7명의 임금을 경험한 것이 된다. 쿠데타를 일으켜 고작 7일 만에 폐위된 왕도 있고, 2~22년 재임 기간 내내 죄를 저지른 임금도 있다. 이 기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이에는 죽고 죽이는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특히 여로보암에게는 살아 있을 때부터 저주가 선포돼 있었다. “여로보암은 자기도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까지 죄를 짓게 하였으므로, 주님께서는 여로보암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리실 것입니다.”(왕상 14장 16절(이하 새번역). 똑 같은 구절이 15장30절에도 반복된다.

 

저주의 내용도 섬뜩하다. “내가 여로보암의 가문에 재난을 내리겠다. 여로보암 가문에 속한 남자는, 종이거나 자유인이거나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모두 끊어 버리겠다. 마치 사람이 쓰레기를 깨끗이 쓸어 버리듯이, 여로보암 가문에 사람을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쓸어 버리겠다.”(왕상 14장10절)

 

그런데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도 똑같이 죄의 길로 걸었다.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그도 그의 부친이 걷던 그 악한 길을 그대로 걸었으며, 또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는 그 잘못을 그대로 따랐다.”(15장26절)

 

바아사가 반란을 일으키고 북 이스라엘 첫 왕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죽였다. “잇사갈 가문의 아히야의 아들인 바아사가 그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나답과 모든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포위하였으므로, 바아사는 블레셋의 영토인 깁브돈에서 나답을 쳤다.”(15장27절)

 

그렇다고 바아사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고, 여로보암이 걸은 길을 그대로 걸었으며,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는 그 죄도 그대로 따라 지었다.” 그에게도 저주가 선포되는데 “바아사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성 안에서 죽는 사람은 개들이 먹어 치울 것이고, 성 바깥의 들에서 죽는 사람은 하늘의 새들이 쪼아 먹을 것이다."(16장 4절)

그 이유도 설명되는데,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가문처럼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므로, 주님의 노를 격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의 가문을 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16장 7절)

 

바아사의 아들 엘라는 신하의 집에서 술에 취해 있다가 호위부대를 지휘하던 장군 시므리에게 시해됐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바아사와 그의 아들 엘라가 지은 모든 죄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분노를 샀다.(16장13절)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군인들은 그들을 지휘하던 사령관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했다. 회군한 오므리의 군대가 몰려오자 시므리는 왕궁으로 도망을 갔다가, 불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권을 잡은 오므리는 사마리아 산지를 사들여 도성을 건설했다.

“오므리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는데, 그 일의 악한 정도는 그의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였다.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걸은 모든 길을 그대로 따랐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고, 또 우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하였다.”(16장25~26절)

오므리가 죽고 그 아들 아합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게,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가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앞질렀다. 그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서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였다.”(30~31절)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과 바아사 시대에는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했다고 성경이 기록한다. 세월이 흘러 오므리 시대에는 ‘악한 정도가 이전 왕들보다 심했다’고 한다. 아합은 ‘여로보암의 죄를 앞질렀다’고 구약성경 열왕기상에서 썼다.

 

여호와께서 지속적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을 지키고, 율법에 순종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여로보암 이후로 모든 이들이 지속적으로 말씀을 어겼고, 우상을 숭배했다. 선지자들의 저주가 눈앞에서 성취되고, 실제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불행이 그대로 닥치는 데도 그들에게는 말씀에 순종할 능력도, 우상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오히려 여호와께 반역의 강도를 더 높여갔다. 

 

지금부터 약 3천년 전의 역사라고 치부하면 곤란하다. 지금도 죄의 역사는 되풀이된다. 권력과 재물에 대한 욕심은 어느 시대나 똑같다.

이스라엘 정치, 왕들의 족보일 뿐이라고 오해해도 안 된다. 오늘날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복에 환장한’ 우상숭배는 벌어질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간들 역시도, 3천년 전이나 현대나 그저 육체의 소욕을 추구하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눈을 지긋이 감고 바라보는 이가 있다.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다. 당시 교회 안에서 조차 바울을 향해 시기와 질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감옥에 있는 바울을 더 괴롭게 만들기 위해 복음을 전했다.

이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심플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빌립보서1장18절)

그의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뿐이었다. 그를 경쟁 상대로 여기는 교회 사람들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20~21절)라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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