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권리

 

2010년 류승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 ‘부당거래’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부조리를 조명했던 작품이다. 배우 류승범이 검사 역할을, 황정민은 경찰, 유해진이 건설업자로 등장한다.

검경이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하며, 범인을 조작하려 하는 등 현실 못지 않은 시나리오가 긴장을 더 한다. 출세에 눈이 먼 경찰과 검찰의 갈등이 이야기의 큰 틀을 이루며, 양아치 같은 검사 류승범은 “대한민국 일개 검사가 경찰을 불쾌하게 하면 안 되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등의 명대사를 남겼다.

검사가 주인인 세상, 검찰이 국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로 군림하는 세상이다.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범죄 혐의가 아무리 뚜렷해도 기소하지 않을 수 있는 권력을 독점하고 있으니, 이런 병폐가 나오는 게 어쩌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공권력을 사유화 하며, 그것을 권리라고 착각하는 일이 빈번해지면 결말은 뻔하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엄청난 은혜를 입었지만 그것을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한 민족이 이스라엘이다.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구약성경 예레미야 2장 35절의 이야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향해 “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악을 썼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너희들이 무죄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심판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그리고는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신다.

앞서 13절에서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라고 하셨다. 존재의 근원인 여호와 하나님은 잊어버린 채 스스로 뭔가를 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죄의 본질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레미야 당시의 이스라엘 족속만이 갖고 있던 문제가 아니다.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5~6절)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를 통과하던 당시에도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스스로의 방식으로 살아갈 궁리만 했을 뿐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과 은혜에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신명기 9장 6~7절)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것은 훌륭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태생 자체가 ‘목이 곧은 백성’ 곧 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늘 여호와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그분을 항상 거역했다.

 

생수의 근원이 되는 여호와를 버리고, 터진 웅덩이만 찾는 어리석은 행태는 예레미야 이후 이스라엘 자손들도 계속 반복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 대대로 계속 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절)

그런데 이것은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훨씬 앞서 모세에게도 하셨던 말씀이다.

신명기 31장16절에서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기록한다.

이어 20절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언약과 복을 받았지만 그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다.

 

예레미야 2장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를 읽을 수 있다. “너희는 사내를 홀리는 데 능숙하여 매춘부조차 너희에게서 배우게 되었구나(33절, 공동번역)”와 같은 구절도 등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에 따라 저주를 당하고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 죄악을 지적하셨으나, 그 근원은 선악과에 닿는다.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 생각의 주체로 서는 것, 그것을 질책하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 모든 인간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다. 어느 인간도 선악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선악과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 모든 세상 일에 자신이 가진 선악지식으로 판단을 내린다.

이스라엘도 그랬다. 여호와께서 꾸짖는 내용이 이렇다. “왜 이 꼴이 되었는지 알고 있느냐? 너희를 이끌어주던 야훼 너희 하느님을 저버리고서야 어찌 이 꼴이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이제 너희가 나일 강 물을 마시러 이집트로 가다니 웬 말이며, 유프라테스 강 물을 마시러 아시리아로 가다니 웬 말이냐?”(공동번역, 예레미야 2장 18절)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강대국, 힘 있는 자들을 의지한 것을 질책하신다. 이것을 예레미야서는 부정한 짓을 한 여인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보이는 힘의 세상을 무시하며 살기는 불가능하다.

 

이런 이야기는 구약성경의 마지막인 말라기에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1장2절)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라기 1장6절)

 

어디를 둘러봐도 도무지 답이 없을 것 같은 인간들이다. 이러니 여호와께서는 탄식하신다.

“나는 너를 종자가 아주 좋은 제일 좋은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어떻게 하여 네가 엉뚱하게 들포도나무로 바뀌었느냐?”(예레미야 2장21절, 새번역)

그러나 하나님은 마냥 분노하고 탄식만 하시는 분은 아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모든 일을 창세 전에 마음 먹으신 대로, 언약대로 반드시 이뤄 내시는 분이다.

여호와께서 심은 좋은 포도나무가 들포도나무로 바뀌었다 해도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리스도 예수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한복음 15장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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