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하여야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결말이다.

모든 예수님의 비유가 그렇듯, 이 이야기도 다양하게 해석된다. 어디에 포커스를 두느냐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

이 비유는 레위인이나 제사장처럼 종교적 위선만 떨지 말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 난관한 봉착한 이웃을 직접 도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구원을 얻으려면 인간답게, 사람답게, 최소한 ‘착하게 살자’는 구호다.

 

먼저, AD 3세기에 활동했던 초기 기독교의 교부 오리게네스의 상징적 해석을 보자.

“부상당한 사람은 인류를, 예루살렘은 잃어버린 낙원 또는 에덴을, 여리고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강도는 어둠의 세력을, 제사장은 율법을, 레위인은 선지자를,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상처는 불순종과 죄의 결과를 상징하고, 짐승은 그리스도의 몸을, 여관은 교회를, 주인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주님의 장래 재림을 상징합니다.”

에덴에서 쫓겨나 세상에 살면서 어둠의 세력에게 농락당하며, 죄와 불순종에 빠진 인류의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해석이다. 오리게네스의 이런 풀이는 성 어거스틴을 비롯해 초기 기독교 일각에서 받아들여졌고, 현대에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 비유로 말씀하신 의도다. 그것은 성경 전체와 누가복음 10장의 앞뒤 문맥 흐름을 따져 파악할 필요가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에 들어 있다. 율법교사는 예수를 떠보기 위해 시험문제를 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는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질문으로 되받았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하고 구약 모세오경의 신명기 6장과 레위기 19장 말씀을 인용했다.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누가복음 10장28절)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다시 예수께 물었다. 이후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펼쳐진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예수께 물은 사람이 또 있었다. 부자 젊은이로, 마태복음 19장과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한다.

예수께서는 이 젊은이에게 ‘살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등 구약 출애굽기 19장의 십계명을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젊은 부자는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그 젊은이를 ‘유심히, 눈 여겨’ 보시고는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 젊은이는 울상이 되어 돌아갔다.

 

율법교사와 부자 젊은이의 관심은 ‘영생’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머릿속에는 ‘일’이 가득했다. ‘무슨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것인가 하는데 골몰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 찾아가 질문을 했지만 실상 그들 마음 속에는 나름대로의 처방전을 갖고 있었다. 율법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부자 젊은이는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지켰고, 율법교사 역시 언제든 행할 준비가 돼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방법을 알려주셨다. “이를 행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자신감이 충만했던 부자 젊은이에게 예수의 말씀이 던져지자 그의 행함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소유를 다 팔아 나눠주라는 말씀 앞에 섰을 때 그는 ‘영생 없을 자격이 없는 자’로 판명됐다. 물론 그가 재산을 다 팔아 이웃과 나눴다고 한들, 영생으로 가는 길목에 또 다른 계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일’에 대한 것이 아니었음을 눈치채야 한다. 그것은 부자 젊은이의 인간적 본질을 드러내는 말씀이셨다.

 

율법교사도 ‘자기 존재 증명’에 눈이 시뻘겋게 돼 있었다. 예수님 앞에서도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자신있게 물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신 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되물었다. ‘나=강도 만난 자’가 된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너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라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기고 마구 두들겨 맞아서 반쯤 죽은 상태’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내(예수)가 바로 강도 만나 죽어 있는 자들의 이웃이라고 알려주시고 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골몰하는 율법교사에게, 부자 젊은이에게 하신 것처럼 “사람으로서 할 수 없으며,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다”는 점을 가르치신다.

 

아담의 선악과 사건 이후, 또한 율법이 주어진 이후, 착한 삶을 통해 구원받은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성경의 말씀이다. 구약 내내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말씀을 어겼다고,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신약에서도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1장22절)”고 해놓고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2장10절)”라고 정반대로 들리는 이야기를 하신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마지막에 “이를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율법교사에게 자신의 행함을 통해 불가능을 확인해 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물론 율법을 완벽하게 행했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 자체에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능력으로 말씀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영생이란, 구원이란, “내가 무엇을 하여야…”에 있지 않고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로마서9장21절)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 대답은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 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에 있다. (9장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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