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죽음

 

“맛없는 빵에서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듯이, 멋이 없는 인생에서는 사는 즐거움을 찾을 수가 없다.”

“사람은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열 가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죽어야 할 이유를 따져 봐야 한다. 그리고 나서 죽어야 할 이유가 없으면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삶에서 곱씹어 볼 만한 주옥 같은 이야기를 했던 주인공은 지리산 청학동 훈장 이정석 씨다. 한학을 깊이 공부했던 이 씨는 1995년말 펴낸 에세이집 ‘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 사람을 보고 웃는다’에서 세상을 향한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오래 전 어느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 시선을 끄는 제목의 하얀 표지를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서당 훈장의 글은 어딘가 신선하고 끌리는 맛이 있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리산 청학동은 하얀 한복에 댕기머리를 땋은 아이들이 뛰어 노는 곳으로 인식됐다. 현대 문명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란 선입견이었다.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멸시를 보내고, 넘치는 사람에게는 아첨을 하고, 힘없는 이들을 짓밟으면서 힘 센 이들에게는 추파를 던지는 세태가 아닌가.”

그럼에도 바깥 세상을 향한 저자의 지적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는 책에서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1990년대에서 2000년으로 넘어갈 즈음의 한국사회는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자신감에다 급격한 경제발전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뤘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사회의 위기라는 인식이 적지 않게 퍼졌다. 억눌렸던 시민들의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하면서 사회적 혼란도 찾아왔고, 경제적으로는 IMF 사태의 전운이 짙게 드리웠던 시기다.

어쩌면 다소 어수선한 한국의 상황을, 어쩌면 한발 물러서서 바라본 청학동 훈장의 메시지가 그래서 독자의 시선을 붙잡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책 서문에서 “세상에는 사람들이 참 많다. 청학동의 안개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그들을 보고 웃었다. 세월은 절로 흘렀고 우리의 그 웃음도 흘렀다”고 적었다.

세상 사람들이 지리산 청학동 훈장을 보며 웃었던 ‘웃음’과 청학동 훈장이 세상 사람들을 보고 웃었던 ‘웃음’의 의미는 결코 같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문명세계와 청학동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개역개정)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표준새번역)

 

사도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 6장14절이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과 세상이 분리돼 있음을 고백한다. 기준점은 십자가다. 정확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표준새번역이 쉽게 설명했듯 십자가는 죽음이며, 심판이다. 십자가라는 망원경을 통해서 서로를 바라보면 바울도 죽었고, 세상도 죽었다. 바울은 십자가 때문에 세상이 이미 심판을 당해 죽었다고 선언하고, 세상은 십자가 너머의 바울을 가치 없고, 죽은 존재로 취급한다.

바울이 이런 극단적인 고백을 하게 된 것은 갈라디아의 교회에 복음의 메시지를 주기 원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1장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고 통탄한 뒤 3장에서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면서 탄식한다.

갈라디아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의 완전한 복음’을 들은 뒤에도 여전히 할례와 율법에 방점을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은혜의 복음도 중요하지만 할례를 받고, 율법도 행해야 온전한 믿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도 있었다.

바울은 6장 12~13절에서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사람들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것입니다”라고 지적했다.

 

바울은 여기서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자들과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을 구별한다. 바울 자신은 단호하게 십자가만 자랑하겠노라고 말한다. 심지어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 쪽에서 보면 율법을 통해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죽었고, 반대로 할례와 율법을 지킴으로 자랑을 삼으려는 사람들 쪽에서 보면 바울 자신이 죽은 존재로 보일 것이라고 진술한다.

율법과 할례라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 자랑거리를 만들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초대교회 갈라디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득실득실하다.

매 주일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라는 이름의 메시지가 인간의 행함과 삶에 대한 것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것인지 차분히 따져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청학동 훈장 이정석 씨는 ‘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 사람을 보고 웃는다’는 책에서 “인생은 그저 산다는 데는 별 의미가 없고 뭔가 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인생은 자기 가치를 찾으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라며 “나는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신의 유일한 존재이유라고 믿는다”고 적었다. 더 나아가 저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신과 종교를 수단으로 삼으라”고 가르친다.

몇몇 문장들은 청학동 훈장의 에세이가 아니라 어느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라고 해도 깜빡 속을 정도다.

 

바울은 이런 가르침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에서 이 ‘결코’라는 단어 때문에 바울은 세상으로부터 죽은 존재로 취급을 당했다. 그럴수록 바울은 십자가에 더욱 매달렸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결심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처럼 바울을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의 은혜와 죽음이 바울을 삼켜버린 것이다. 바울은 세상에 대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일 듯 달려드는 세상을 향해 그처럼 담대하게 “오직 십자가”만 외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똑같이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1장15절)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회개는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행위의 잘잘못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는 현실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어 대신 죽으러 왔으니, 그 십자가의 복음을 믿으라는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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