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설움’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 통치가 한창이던 1940년 백년설 씨의 노래로 발표됐다. ‘번지 없는 주막’ 등과 함께 백씨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나이에 안 어울리지만 ‘나그네 설움’을 흥얼거릴 수 있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시골 어르신들이 부르던 곡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농번기가 끝나면 마을 어른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고, 장구를 치면서 흥겹게 놀던 기억이다.
새삼 ‘나그네 설움’을 들먹이는 것은 가사 때문이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어딘가 구슬프면서도 이민자의 애환을 담은 것 같기도 하다. 특히 “타관 땅 밟아서 돈 지 십 년 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 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라는 2절은 더 곱씹어 보게 하는 맛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성도의 정체성을 ‘나그네’로 정의했다. 창세 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언약, 그 말씀에 따라 이 땅에 태어나 복음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들이 베드로가 말한 나그네들이다. 이것은 베드로 스스로의 삶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십자가 사건 이후 스스로도 부끄러워 달아나고,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며 숨을 수밖에 없던 그를 예수님은 기어코 디베랴 호수까지 찾아가셨다. 무안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흘렸던 뜨거운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유대인들이 무서워 또 달아났다.(갈라디아서 2장)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알게 된 ‘성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예수께서 계시는, 돌아가야 할 약속의 땅, 본향을 늘 그리워했을 것이다. 한심할 정도로 한숨만 나오는 자신의 발자취를 돌아볼 때마다 아마도 베드로의 가슴 속에는 ‘나그네의 설움’이 늘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베드로는 서신을 통해 ‘복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장 24~25절)
나그네로 살며 평생 복음을 전했을 베드로가, 복음을 요약하는 장면이다.
복음은 찬란한 역사와 화려한 문명 같은, 인간들의 육체가 생산한 모든 것을 한낱 풀이라고 치부한다. 그 풀이 맺어낸 걸작품, 그 꽃마저 결국은 시들고 떨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기독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에 불과하겠지만 되레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하자’며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그리스도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그들에게 복음은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것”이라고 직격한다.
그러면서 복음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영원의 관점에서 ‘풀의 꽃’과 대조되는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그것은 ‘오직 주의 말씀’이다. 그것 만이 세세 영원토록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풀에서 활짝 피워낸 꽃이 아니라 바로 그 주님의 말씀이 성도를 거듭나게 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베드로전서 1장 23절)”
그러면 이 씨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자신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네 몸에서 상속자가 태어날 것을 말씀하시고, 22장 모리아산 사건 이후에는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육체적으로 그 씨는 아브라함의 아들인, 아내 사라를 통해 약속으로 태어난 이삭이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씨, 상속자, 자손은 오직 한 사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풀이한다.
결국 바울과 베드로는 ‘썩지 아니할 씨=예수’라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육신의 씨와 자손, 다시 말해 유대 혈통이나 율법지킴이라는 인간의 노력과 헌신을 통해서 성도의 출생과 구원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고 가르친다. 세상에 주어진 유일한 큰 복과 번성의 통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뿐인 것이다.
사도 요한의 진술도 맥락을 같이 한다.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아 밀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요한복음 1장14절)
그런 관점에서 베드로전서 1장21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는 구절은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다.
베드로가 복음을 요약한 부분은 사실 구약성경 이사야 40장 초반부의 인용이다.
이사야 40장은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희망의 말씀으로 시작된다. 예루살렘에 외치기를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앞두고,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던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는 목소리가 이사야를 통해 먼저 들린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이사야 40장 5~8절).
주목할 점은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이유다. 이사야는 그것이 여호와의 ‘기운’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운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루아흐’로, 창세기 1장2절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번역했다. 여호와께서 직접 세상을 마르고 시들게 하시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 그리스도 예수 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성도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이 피운 꽃이 아니라 지독할 정도로 예수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요약한 복음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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