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쯤이다. 신문사 스포츠부에서 축구를 취재하며 K리그 발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프로축구단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에인트호벤과 페예노르트를 거쳐 레딩FC를 찾아갔다. 당시에는 2002년 한국월드컵대표팀 멤버들이 유럽 무대에 많이 진출해 있었다. 최근까지 경남FC감독을 했던 설기현은 잉글랜드 프로축구 레딩FC에서 스트라이커로 뛰었다.
레딩FC 홈구장을 방문했을 때 놀란 것은 경기장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벽돌이었다. 레딩 축구단의 애칭인 ‘Royals’를 사용해 ‘Loyal Royal 누구누구’ 하는 식으로, 서포트 하는 팀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레딩은 런던에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소도시지만 축구단은 1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프리미어리그에 머문 시간은 극히 짧았고, 주로 2~3부리그를 오르내리지만 구단 직원은 약 2만5천 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이 늘 꽉 채워진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것은 공 하나를 두고, 몸과 몸이 치열하게 부딪히기 때문이다. 팀의 전략과 전술이 중요하고, 선수들의 화려한 개인기가 주목을 받는다. 그래서 축구를 ‘뷰티풀 게임’이라고도 부른다. 축구는 국가와 그 도시를 상징하고, 대표한다. 유럽리그에서 우승 트로피라도 차지하는 날이면 그 도시 전체가 퍼레이드를 벌이고, 축제에 휩싸인다.
최근 한국축구대표팀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개념 없는 감독의 처신부터 시작해 선수단 내분도 심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사태는 위르겐 클린스만이라는 독일 출신 감독을 선임했을 때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그가 지도했던 팀-그것이 클럽이든, 국가대표팀이든-의 행적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대부분 실패했고, 감독으로서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줬다. 축구협회는 팬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런 감독을 기어코 선임했다. 결국 이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축구팬들이 분노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시안컵 결승 진출에 실패하면서 한때 한국대표팀의 재능으로 불리던 어린 선수는 졸지에 ‘싸가지 없는 X’으로 낙인 찍히며 국민 비호감이 됐다. 혈기 왕성한 20~30대 초반의 선수들이 모인 곳이 축구대표팀이다. 그들 가운데는 어디를 가든 늘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고, 슈퍼스타로 인정 받기 원하는 자존심 강한 선수들이 많다. 의견충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축구팬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국가대표팀을 곧 자신의 팀, 우리 팀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축구라는 스포츠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자신의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대리만족 장치이기 때문이다. 국가대표팀을 곧 내 팀이라고 여기면, 그곳에서 불거지는 문제는 곧 ‘내 문제’가 된다. 쉽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소속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개인의 정체성과도 직결된다. 훌리건처럼 때때로 축구장 폭력사태 때문에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소속된 단체나 국가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며,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국가나 단체가 위기에 처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기도 한다.
바울 사도가 그랬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을 보면 사울(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극도로 싫어했다. 유대교 입장에서 보면 시골 촌뜨기 청년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믿는 초기 기독교는 우매한 집단이었고, 박멸해야 할 이단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교회 지도자였던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사도행전 7장)했고,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8장 1절).
사도행전 9장에 넘어가면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바울이 눈에 불을 켠 채 기독교를 핍박했던 이유는 빌립보 3장5~6절에서 설명한다. 바울은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지라”고 고백했다.
창세기 17장12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대대로 너희 가운데서, 남자는 모두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너희의 집에서 태어난 종들과 너희가 외국인에게 돈을 주고서 사온 종도, 비록 너희의 자손은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는 율법의 요구는 레위기 12장 3절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바울은 철저하게 유대교인이었다. 구약성경의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킬 만큼 완벽한 신앙인이었다. 유대교인이며, 선택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자신의 소속, 정체성을 굳게 붙잡은 인물이었다.
갈라디아서 1장14절에서도 바울은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라고 기록했다.
이처럼 바울은 율법을 행함에 있어서 한 치의 오점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울의 삶은 그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스스로 굳게 믿고 붙잡았던 소속감이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붙잡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께서 불쑥 개입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고 물으셨다.
그 예수에 대해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15절에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라고 칭한다. 에베소서 식으로 바꿔 말하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을 택하신 예수”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졌던 바울의 진짜 소속이 그의 삶 속에서 마침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소속이 바뀌자 바울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빌립보서 3장7~8절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고백한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며, 교회를 핍박했던, 그 모든 열심은 배설물로 드러났다. 자신의 유익이라고 생각하고 붙잡았던 것이 실제로는 자신에게 전부 손해로 여길 수밖에 없는 쓰레기 더미에 불과한 것이었다.
소속이 바뀐 바울이 내놓은 신앙고백의 정점은 갈라디아서 6장14절에 모아진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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