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경기를 일으키는 ‘발작버튼’이 있다. “당신이 틀렸다”는 한 마디다. 인간은 “당신이 옳다”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를 품고 있다. 정의, 공정, 진리 등의 단어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되려는 시도, 그것이 삶의 목표다. 나아가 영생과 구원이라는 소망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은 옳은 일, 착한 일, 선한 영향력 확장으로 모아진다.
여기에 찬물을 확 끼얹는 게 성경이다.
갈라디아서 2장 6절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한다. ‘겉모양’이란 단어는 잘생긴 외모를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할례’가 갖는 의미를 설명하는 중에 ‘겉모양’을 이야기 한다. 할례와 복음은 그 자체로, 차원이 다른 본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할례 유무를 근거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다시 말해 그 사람이 어떤 율법적 행위, 착한 일을 내놓았는가에 따라 구원 여부를 결정하지 않으신다는 진술이다.
바울의 이야기는 2장16절에서 좀 더 구체화된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 속에 바울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와 닿지는 않는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 어딘가 허황된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차라리 할례를 받고, 착하고 선하게 살라고 하면 쉬울 수 있지만, 단지 믿으라고 하면 손에 쥘 수 있는 게 없다.
여기서 뭔지 모를 불안감이 싹 튼다. 그래서 남는 선택지는 혹시 마음 속에 있을지 모르는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 만들어서라도 믿음이 있는 체 꺼내 놓고 싶어진다. 헌금을 하고, 선교를 가고, 주일을 지키고, 봉사를 하는, ‘옳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통해 믿음을 증명하고, 스스로 위안을 삼고 싶은 것이다.
마가복음 2~3장에는 제대로 된 ‘옳고, 선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거룩한 삶을 추구했다.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했고, 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같이 나누는 따위의 허튼 짓은 하지 않았다. 또한 금식과 구제를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세상에 증명했다. 안식일에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철저히 금했다.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 예수가 나타났다. 그는 수시로 세리, 창기,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셨다. 따지는 바리새인들에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응수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제자들을 비호했으며, 제사장 만이 먹을 수 있는 성전 제단의 빵을 먹은 다윗의 사례를 들어 바리새인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리고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신성모독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본 예수는 그를 고쳐 주었다. 안식일에도 그런 이적을 행하는지 두 눈을 시뻘겋게 뜨고 지켜보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는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질문하셨다.
기억해야 한다. 이 사건은 지금 자칭 거룩한 자들이,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자들이 모여 있는 안식일의 회당에서 벌어지고 있다. 교회당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선하고, 옳은’ 편에다 놓고, 예수를 안식일 율례를 어긴 죄인으로 여겼다. 그런데 도리어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악하고, 사람을 죽이는’ 존재들로 판정해 버렸다. ‘너희가 틀렸다’는 발작버튼이 눌러졌고,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한 작당모의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체 생산한 허구적 믿음으로 복음을 결단코 믿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구절은 구원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절대 침범하지 못하게 막는, 마치 에덴동산을 지키던 천사들의 불칼과 같은 역할이다. 왜냐 하면 인간의 본질이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인 이상 믿음을 자체 생산할 재간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믿음을 내놓을 만한 인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은 인간의 내부에서 끄집어 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한 것이다. 그것이 “믿음은 선물”이라는 성경의 진의다.
세상에는 ‘복음’이 있고, ‘다른 복음’이 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다른 복음’이라는 단어는 ‘변형된’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복음에 두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는 가짜 즉 비틀어진 복음이다.
바울이 경고하듯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십자가의 복음을 들었다. 그들은 십자가에다 율법적 행위를 덧바르려 시도했다. 할례를 받는 것은 기본이고, 율법적 행위까지 더해 십자가를 치장하며, 스스로를 더 갈고 닦으려는 시도다.
그래서 바울은 탄식한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어리석다고 질타하는 바울의 편지를 읽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을 것이다.
자존심을 긁는 발작버튼이 눌러졌을 때, 한 부류는 바울의 이야기에 화를 냈을 게 분명하다. “열두 사도에 끼지도 못하는 주제에 바울 당신이 뭔데 다른 복음 운운하며 우리 더러 어리석다고 하느냐”며 대들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한 부류는 기뻐했을 것이다. 자기가 내놓은 삶의 열매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한 번 더 발각 당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를 믿지 못하는 자신을 또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바울이 누른 발작버튼은 예수 안에서 자기도 함께 죽은 십자가로 다시 눈을 돌리라는 희망의 채찍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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