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1장-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라는 어떤 무리를 예정하시고 택하셨다. 그들에게 이미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까지 쏟아 부어 주셨다.
성경은 곳곳에 창조 이전에 언약, 계획이 앞서 있었다고 진술한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 대로 하심이라”고 말한다.
시편 139편 16절은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고 기록한다.
창세 전 언약의 목적은 바로 “그 사랑 안에서 예정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에 있다. 그것을 통해 성도들의 찬송을 이끌어 내시려는 것이다.
중요하게 보아야 할 본문은 ‘거룩’이나 ‘흠’ 이라는 단어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경륜하시는 질서와 시간표의 시나리오, 그리고 그 언약의 비밀을 설명하는 성경에 왜 ‘거룩’과 ‘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과정처럼 복잡하지 않게, 그 자리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들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곧바로 그분을 찬송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지 않았다. 그분의 계획은 ‘우리’라는 무리, 다시 말해 거룩하지도 않고, 흠 투성이인 존재들이 ‘시간과 역사’라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신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무리들을 완전한 존재로 만드시겠다는 의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죄인으로 태어나 존재하는 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의 사슬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성실하게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켜도, 또한 헬라인처럼 지혜와 지식을 충만하게 쌓아도, 그 어떤 것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창세 전에 선택한 어떤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베푸시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이에 에베소서1장 7절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진술한다. 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다.
창세기 3장은 창세 전 언약을 설명하는 에피소드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된 아담과 하와를 대신해 피를 흘린 짐승의 이야기다. 에베소서 1장에서 ‘흠’을 이야기 할 때 그 단어는 ‘희생 동물이 흠 없는 상태’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아담을 대신해 죽은 짐승이다.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의 십계명, 예레미야 31장, 에스겔 36장의 새언약도 창세 전 언약을 이해한 다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심지어 신약의 산상수훈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성경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인간의 옷을 입고 오셨어야 하며, 그분께서 실제로 오셔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기록한다.
누가복음 24장 27절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며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며, 46절에서는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니라”라고 강조하신다.
실제로 성경은 예수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특히 피에 대해서. 창세 전 언약에 따라 아담은 죄인으로 내려간다. 선악과를 따 먹는다.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죄가 드러나자 나뭇잎으로 띠를 만들어 가렸다. 마치 도덕 윤리 종교 행위 등을 통해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를 짓고, 거기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수치를 가리려 시도하는 죄까지 더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아담의 나뭇잎 띠 만들기의 노력을 무가치하게 무시하신 다음 무죄한 짐승을 죽여 피를 흘리고 그 가죽을 벗겨 그들의 수치를 가려주셨다.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고 선언하신 분의 말씀에 따라 아담과 하와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 대신 짐승이 피를 흘려 죽은 것이다.
노아의 홍수 심판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을 하셨다. 그때도 정결한 짐승이 피 흘려 죽었다. 구약 내내 양, 염소, 비둘기들이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해 성전에서 매일매일 피비린내 나는 모습으로 죽어갔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 산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조상, 택하신 자, 이삭을 살려내기 위해 짐승이 대신 죽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죽어야 하는 죄인을 대신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데 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아들 이삭의 심장을 쪼개고 각을 떠야 했지만 대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그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이미 결정하신 것이다.
이사야 53장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 즉”이라고 진술한다.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시나리오를 쓰시고 심지어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시겠다고 창세 전에 약속하셨고, 그의 피로 예정하신 자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다 이루셨다. 심지어 그분은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고 죽기를 ‘원하셨다’고 성경이 말한다.
성경과 역사는 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안 된다는 것, 예수의 피 아니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귀가 따갑도록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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