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욥에 대해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기 1장1절)”라고 소개한다. 이 때문에 흔히 욥기를 읽으며 ‘의인이 당하는 고난’에 초점을 맞춘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의인에게도 고난을 허락하시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기본 인식부터 틀렸다. 먼저 욥은 그 존재 자체로 의인에 해당하지 않는다. 성경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의 행위를 근거로 의롭다고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흠이 없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인정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는데 목숨을 걸었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성경은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욥을 소개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일컫는가 하는 의문을 풀어야 한다.
인간이 의롭다고 여겨지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할 때만 가능하다. 성경 욥기는 그래서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된 본질과 그것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피,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복음 이야기로 이해해야 한다.
욥이 고난에 빠진 것은 묵시의 세계에서 일어난, 즉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욥의 행위, 이 땅에서의 삶과는 전혀 별개로 벌어졌다.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잃었을 때 욥은 1장에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는 고백을 내놓는다. 2장에서 자신의 육체에까지 고난이 다가왔지만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말에 “우리가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며 끝내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멋진 신앙고백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3장에서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라며 자신의 출생을 저주한다. 사실상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욥의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셨다. 그것은 모든 성도가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
욥을 찾아온 친구 엘리바스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장7절)”라며, 욥이 무언가 하나님 앞에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질타한다. 이 의미는 엘리바스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책망 받을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멀쩡하게 살고 있다는 뜻도 포함한다.
이에 대해 욥은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6장29절)”면서 친구들에게 반박한다. 또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겠다(7장15절)”고 말한다. 똑바로 착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는데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니 내심 억울해 미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자기의 죄 없음, ‘건재한’ 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항변한다.
친구 엘리바스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더 하나님 앞에서 티 없는 삶을 살았다고 주장하는 욥이다.
친구 빌닷 역시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죄에 버려두셨나니(8장3절)”라고 지적한다. 인과관계, 다시 말해 욥이나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고난을 받아 마땅한 어떤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욥은 이에 대해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13장2절)”면서 “그(여호와) 앞에 내 행위를 아뢰리라. 경건하지 못한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13장15~16절)”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 빌닷이나 엘리바스 등 친구들 못지 않게 충분하고, 자신의 행위는 구원을 받을 만큼 경건했다는 자신감이다.
그러면서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13장18절) 라고 반박한다. 절대로 자신의 행위 때문에 고난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자신의 정의로움과 무고함이 밝혀질 것이라고 당당함을 드러낸다.
친구들과의 길고 긴 논쟁 이후 욥기 38장에서 드디어 여호와의 말씀이 떨어진다. 폭풍우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은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2~3절)고 말씀하신다.
욥과 친구들이 쏟아놓은 무수한 논리들은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무지한 말’로 요약된다. 그들은 모두 생각이 어두운 상태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질문은 욥의 의로움에 대한 판단이나, 그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고 물으신다. 우박 창고와 눈 곳간, 홍수와 별자리, 하늘의 법칙 등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신 뒤 욥기 40장에서 “트집 잡는 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하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또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라고 꾸짖으신다.
인간 욥의 본질은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며 자신의 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주권에 트집을 잡는 자로 드러난다.
결국 욥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이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회개한다.
이 대목은 로마서 9장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20절)”는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절)는 말씀과 연결되는데, 욥의 의인됨은 바로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다시 설명해 준다.
욥이 마지막에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사도행전 13장48절)”는 말씀의 성취가 된다.
욥은 의인이 맞다. 그가 친구들과 논쟁 과정에서 쏟아낸 이야기도 근거가 있다. 그것은 그가 실제로 의인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세 전 작정과 긍휼에 따라 이미 의롭게 여겨졌다는 데서 기인한다. 이 과정을 설명한 성경이 욥기다. 욥은 그 복음의 진리를 배우기 위해 혹독한 고난의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사람 낚는 예수, 사람 잡는 복음’(부크크 출판사)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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