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노래해

 

♬ 험하고 어두운 길 헤매일 때에 주님은 날 부르셨네/세상의 가치 없는 노래 부를 때 주님 날 구원하셨네/

가시밭 험한 곳도 찾아가서 주님을 노래 부르리/내 주여 나와 함께 하시어서 늘 찬송하게 하소서/

이 세상 노래 다해도 내 맘엔 기쁨 없지만/그러나 이젠 찾았네 진실한 나의 노래를/주님의 사랑 주님의 은혜 내 생명 바쳐 늘 노래해 ♬

 

1980년 초, 지리산 골짜기에 문을 연 작은 개척교회에 ‘늘노래선교단’이 찾아왔다. 1970년대 후반 유의신, 노문환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늘노래선교단은 한국 개신교 제1세대 찬양사역자로 꼽힌다. 그들은 교회, 군부대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르는 곳이면 어디나 달려가 1만5천회가량 집회를 했다.

 

흑백TV에서나 겨우 보던 드럼, 트럼펫, 기타의 밴드연주는 꽤나 충격이었다. 평소 교회에 출석하지 않던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구경을 나왔다. 비좁은 교회의 단상은 여러 악기로 가득 찼고, 100명 남짓 앉을 만한 예배당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마룻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듣던 찬양은 뇌리에 깊이 박혔다. 교회에 관심이 없던 친구들도 늘노래선교단의 공연을 본 뒤 ‘천국합창단’이란 찬양 가운데 “♬ 주여 내게도 저 합창단에서 노래하도록 하소서”라는 대목을 흥얼거렸다. ‘저 합창단에서’라는 고음부분이 귀에 쏙 박혔기 때문이다. 국악 느낌이 물씬 풍기는 ‘예수님이 좋은 걸’이란 찬양 때는 마을 할머니들이 일어나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기도 했다.

40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늘노래해’라는 찬양의 도입부와 잔잔한 듯 휘몰아치는 선율은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가사에 담긴 뜻을 곱씹을 때면 때로 아직도 울컥한다.    

 

늘노래선교단의 또 다른 대표곡은 노문환이 작사, 작곡한 ‘평화의 노래’다.

♬ 나 어느 날 괴로워서 눈물로서 아뢰일 때/주님께서 나의 맘 아시고 위로하여 주셨네

갈 길 몰라 방황할 때 들려오는 주의 음성/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씀 기쁨 되어 용기 주네

너 슬퍼 마라 언제나 함께하고 무거운 짐 대신 지리/너 괴로워 마라 너는 내 백성 두려워마/오 나의 주 사랑의 주/네 피곤한 맘 쉼을 주셨네♬

 

‘평화의 노래’에서 중요한 한 단어만 콕 찍으라고 하면 ‘대신’이다. ‘대신’이란 단어는 기독교의 복음을 잘 함축하는데, 그 이유는 ‘담당’이라는 의미로 곧장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담당시켰도다).”-이사야 53장4~6절(새번역) 

 

 예수께서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셨다는 의미는 인간의 목숨조차도 죄인의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선포다. 성도의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했다’는 것은 성도에게 주어진 유일한 소망은 예수의 십자가뿐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내놓는 최선의 종교적 행위나 그 어떤 선행도 죗값을 치르기에는 가치가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린도후서 5장14절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하신 것은 성도의 죄 가운데 일부가 아니다. 기독교 일각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어느 정도 죄값은 인간이 치르고, 나머지만 예수께서 대신 담당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성도의 모든 고통과 슬픔, 허물과 악함까지 대신 맡으셨다.

고통과 슬픔은 인생살이에서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그런 종류만을 말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떠나 선악 판단의 주체로 선 자신의 모습에 대한 고통과 슬픔이다. 그것은 곧 자아의 죽음이다. 그 죽음을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복음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징계가 십자가에서 끝났다고 선포한다. 죄에 빠져 죽어야 하는 인간들, ‘그러나 이제는’ 성도들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장15절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한 것은 골고다 언덕에서 자신도 십자가에 매달려 함께 죽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려 하게 하심이라”-고린도후서 5장21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성도의 죄를 모두 예수께서 대신 담당하도록 하신 구원계획에 들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담당하셨고,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노문환은 ‘평화의 노래’에서 기쁨과 용기와 쉼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대신, 담당’을 통해 주어지는 복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평화는 인간들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기대하는 수준이 아니다.

십자가 복음과 정면으로 마주한 이들은 반드시 가난한 심령의 자리로 밀려간다.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그 어떤 공로도 내놓을 것이 없는, 빈 손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뼈를 깎는 마음으로 애통하게 된다. 자신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예수께서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 받은 자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된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내놓는 의의 실체는 하나님 앞에서 전혀 옳다 함을 인정 받지 못하는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이사야 64장) 성도는 그래서 오로지 ‘율법 외의 한 의’, 십자가의 의를 붙들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이 예수로부터 받은 긍휼이 얼마나 큰 것인지 체감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향해 긍휼한 마음을 품는다. (사람 낚는 예수, 사람 잡는 복음. 부크크출판사’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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