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믿고 그 가치를 따라 행동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보이는 것에 의존하고 보이는 것을 갈망하며 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신앙은 낯선 도전이다.
기독교 신앙은 시작부터 육안으론 볼 수 없지만 확실한 대상인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믿는 것이다.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성경의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해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은 변질되곤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서 멀어져 다시 눈에 보이는 활동들과 성과들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으로 쉽게 변질된다.
특별히 자본주의 물질만능 편의주의 시대와 환경에 놓인 신앙인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이러한 변질에 미혹되어 신앙이 역주행하는 현상을 낳는다. 심지어 교회가 이런 신앙을 도리어 눈감아 주고 위로하고 때로는 보호해 주는 울타리 역할을 할 때도 있다.
처음 회개하고 믿음을 다짐했을 때는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 주시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신앙이란 것을 시작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항상 더 편하고 편리하고 더 쉽게 모든 것을 이뤄줄 것 같은 안정감을 주기 마련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불안하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처음 은사를 사모했던 마음은 물질의 축복을 더 원하는 마음으로 바뀌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교회 예배당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시간들은 편안히 집에서 유튜브를 통해 흘러나오는 찬양을 들으며 자신을 위로하는 연민의 시간으로 대체된다.
자신의 영을 새롭게 일깨우는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직접 읽는 수고로움 보다는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 한 편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한 시간처럼 착각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살아있는 말씀 듣기를 열망하며 멀리라도 부흥회를 분주히 찾아 다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는 세상을 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기독교 방송이나 강사들의 강연을 들으며 신앙이 아닌 신념을 확고히 하는 것에 시간을 소모한다.
심지어 이런 신앙의 역주행을 돌이키기 위해 하나님이 시련을 주신다 해도 더 이상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 눈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신앙의 눈이 이미 멀어버렸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만져보지도, 안겨 보지도 못했던 분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무엇보다 실존하시는 자신의 창조주 아버지며 인생의 목적이었다. 아브라함은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신앙의 확고한 기준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가 이삭을 드릴 수 있었던 것도 눈에 보이는 이삭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매 순간 자신과 동행하고 자신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보면 기독교 신앙은 이런 신앙이 아니면 신앙이 아니다.
이런 신앙은 절대 단기간에 생기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는 한 결코 소유할 수 없다. 오직 매 순간 자신에게 닥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강건히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좁은 신앙의 길로 전진하는 것 외에 이런 신앙은 불가능하다.
아브라함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을 바라보며 ‘여호와 이레”라고 고백한 것이 현실이 된 것처럼 신앙인의 믿음의 고백은 언젠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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