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의 총리가 되어 바로를 위해 모든 것을 지혜롭게 행한 요셉. 그는 7년간 이어진 기근에 오히려 애굽을 세상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로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한때 요셉을 노예로 팔았던 그의 형들과 자신이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 야곱은 당대 최강국 애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처음 이민을 갈 때는 총리의 가족 자격으로 초청이민을 받은 것이니, 왕을 만나는 특전부터 살 수 있는 영토를 무상으로 받는 것까지 특별한 환영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가 죽고 요셉도 죽고,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통치자 바로와 함께 권력의 자리에 앉은 애굽인들은 더 이상 요셉을 알지 못했다.
처음에 칠십 명으로 들어온 야곱의 히브리 이민자들이 이미 애굽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크게 성장했으니 새로운 바로에게 그들은 더 이상 환영 받는 존재가 아닌 위협적인 존재로 보인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바로는 이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점점 핍박하며 노예로 삼는다.
요셉을 통해 지금의 강대국 애굽이 될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합리한 처우가 아닐 수 없다. 겉으로 보면 히브리인들은 요셉으로 인해 모든 특혜를 받고, 대접을 받던 구별된 존재에서 이제는 요셉이 없으니 핍박과 차별을 받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데 정말 그들을 구별된 존재에서 차별 받는 존재로 추락시킨 것이 요셉과 그의 공헌이 잊혀졌기 때문일까?
세계가 지구촌으로 불릴 만큼 가까워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라마다 곳곳에서 이민자들은 차별을 받고 심지어 그들의 처지와 환경에 따라 멸시와 조롱을 당하기도 한다. 이들이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단지 인종이 다르고 태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핍박을 받고는 한다.
이제 와서 이민 1세대 자신의 부모가 그 나라의 발전을 위해 과거 얼마나 헌신하며 공헌했는지 이야기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미 나라는 성장해 있고 1세대들은 오래 전에 잊혀졌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요셉의 이야기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처음부터 요셉을 통해서 가족이 이민을 올 수 있었고 환경이 더 좋은, 살 만한 선진국 애굽에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그 나라의 총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를 총리로 만들어 준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을 주셨기 때문이며 또한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즉, 알지 못하고 바랄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은 요셉에게 원하고 바랄 수 있는 희망을 처음부터 주셨고 요셉은 그것을 신뢰했기에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애굽으로 이주해 온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과거 “꿈꾸는 자”(창세기 37:19)라고 조롱했던 것을 회개하고 이제 자신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꿀 수 있기를 소망했다면 어떠했을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을 만나게 된다면 당장은 억울한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안타까운 사건들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요셉이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노예로 팔리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을 기억하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하게 모함을 당해 옥에 갇히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꿈을 신뢰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면 결국 그들이 어디에 있으나 그들을 돌보시고 부흥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은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지금 이민사회에서 구별된 존재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으며 간구했던 것처럼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누가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곳의 주류 사회에 속하지 못한다면 차별을 받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설령 주류사회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 세대가 지나고 나면 자식들은 또 다시 새로운 핍박과 차별 속에 놓일 수 있다.
하지만 요셉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꿈을 이뤄 자신을 높여 주시기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처럼 인내해야 한다. 스스로 노력해서 높아진 자리에서는 언제든지 내려올 수 있지만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자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는 이유가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암기하기 쉬운 신명기 7장7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하나님의 구별된 사랑이 우리와 어디서나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지금 우리가 세계 곳곳 처소에서 겪게 되는 “차별”은 우리를 다시 한번 “구별”된 삶으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오늘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 살다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을 반드시 만나는 때가 있다. 하지만 그를 통해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신뢰할 수 있다면 그 삶과 후대의 삶은 더 이상 요셉이 필요로 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요셉이 될 수 있는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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