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딸이 혼자 책을 읽다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 “아빠, 그런데 왜 김구 선생님은 김구라고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백범이라고 불러요?”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그런데 순간 오늘 오전에 묵상했던 사도행전 4장이 떠올랐다. 백범(白凡)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당시 독립운동의 중요성과 함께 설명해줄 수 있었다.
김구 선생님의 독립운동 이야기처럼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사는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긴박감 넘치는 역사의 현장을 그리고 있다. 이제 막 유대교 밖으로 독립을 시작하려고 하는 초대교회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다. 도리어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이방인 지도자인 빌라도의 손에 넘겨주어 죽게 한 것 같이 종교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분명 주님의 공생애 동안 삶의 본보기와 죽음과 부활을 통한 복음의 선포는 율법에 얽매여 있던 하나님의 백성을 자유롭게 해준 신앙독립의 탄탄한 기틀을 제공했다. 이제 그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만 하면 되는데 그 길은 순탄치가 않았다.
사도행전 3장에서 시작되는 이러한 신앙독립 투쟁의 역사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면서 시작된다. 성전 미문 앞,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본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완전히 기적적인 치유를 일으키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기적의 결과를 목격했으며 그 기적에 이어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 주님을 영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빌라도에게 주님을 넘겨주는데 공조했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에게 그 사실은 달갑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주님이 부활하신 무덤을 지키던 보초들을 매수해서 주님이 부활한 사실을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간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미문 앞에서 이뤄진 기적적인 광경은 목격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예루살렘 모든 사람의 눈과 귀를 막고 그들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들은 모여서 회의를 하고는 4장 18절에 베드로를 향해 다음과 같이 심판을 선고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믿는 대로라면 이미 죽은 예수인데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심판은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말라고 하거나 아픈 병자를 성전 앞에서 치유하지 말라고 금하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 이들이 사도들에게 요구한 것은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더 이상 설교를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이 가장 두려워할만한 건 제자들의 설교와 전도였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금지한 단 한 가지는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들 종교지도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다름아닌 “예수”라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름만은 도무지 사용하지 말라고 심판을 내린 것이다.
강력한 무기를 앞세운 일제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의 아무런 힘도 없는 한 사람인 백범 선생을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었을까? 그 이유는 총과 칼로도 잠재울 수 없는 “독립”이라는 삶의 목표가 백범에게 확고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겪고 있는 수 많은 아픔과 어려움을 무엇으로 이길 수 있을까? 오직 능력있는 예수님의 이름 만이 모든 것을 이기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의 능력이 자신의 삶에 나타나려면 반드시 마음 속에 어떠한 세상의 미혹도 멀리하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겠다는 신앙의 독립을 이뤄야 한다.
한 나라의 독립이 만세를 이룬 것처럼 세상 권세에 무릎을 꿇지 않는 신앙의 독립은 아멘으로 모두에게 화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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