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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천 칼럼

    신학박사
    캐나다크리스챤컬리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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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을 수 없는 것과 갚을 필요가 없는 것의 차이

 

흔히 “갚을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한다. 사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감히 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어 그 광대함을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감사하다는 의미다.

이런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성도의 심령에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 라는 찬양이 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감사와 간증에도 불구하고 갚을 수 없을 정도로 한계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이렇게 깊고 높고 광대한 하나님의 은혜인데 “갚을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마치 하나의 관용구처럼 사용되면서 그 본래의 뜻에 반하는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이 “갚을 수 없는 은혜”가 이제는 어차피 노력해도 갚지 못할 은혜이니 “갚을 필요가 없는 은혜”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표현한 것은 갚기 위한 어떤 노력도 소용없다는 말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적인 해석은 모든 성도가 이런 은혜에 대해 빚진 자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데 초점이 있다.

문제는 이 은혜를 갚아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인간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말 그대로 ‘하.나.님.’이 대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같이 갚을 것이 없는 대상을 향해 진 은혜의 빚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에 어떻게 갚아야 할까? 하나님께 빚진 자의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성경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대상에게 갚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을 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로마의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두 번씩이나 성도들에게 자신이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실제로는 아무 것도 받은 적이 없고 빚을 진 것도 없는 로마교인들에게 바울이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너무나 큰 은혜이지만 그 은혜에 대한 감사함을 눈에 보이는 이웃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베푸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그들에게 사랑으로 열심히 갚아나간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을 새롭게 발견한 성도의 삶은 힘있는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런 성도에게는 이 세상이 아무리 자신과 무관하고 무정해 보인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사랑으로 갚아야 할 선교지로 보일 것이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만 허우적대며 오직 하나님께 위로만을 간구한다면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갚을 필요가 없는 가치로 인식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어쩌면 그 괴로운 현실에서 미로와 같이 계속 헤매며 살아가게 될 지도 모른다.

항상 하나님의 마음으로 남의 아픔과 고통을 먼저 돌아보고 헌신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아픔은 또 누군가가 돌아봐 주고 주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치유해 주시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성도의 삶이다. 이제 그런 간증을 만들어 가는 힘있는 성도의 삶 개척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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