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C칼럼-205
(지난 호에 이어)
결국 '나'라는 존재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 모두는 알지 못하는 먼 곳으로 떠나버린다.
문제는 매일 같이 멀티페르소나(Multi-Persona)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씩, 아니 자주 가면을 쓰고 살고 있는 내가 진짜 나라고 착각을 하고 산다는 데 있다.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도 가면 속에 있는 자기를 잊고, 자기자신이 진정 위대한 인물 또는 지도자인 것으로 알고 살고 있다는 것이며, 필자 역시 내가 쓰고 있는 가면 아래 감춰진 진짜 나를 인식하지 못 하며 살고 있다는 말이다.
수백 년 전에 쓰인 ‘유토피아’란 책을 읽으며 내용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소설 유토피아를 저서한 토마스 무어는 신을 믿는 사람이었고, 또 나라에도 충실한 신하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와 신임을 받았다. 그럼에도 당시의 왕실과 귀족들의 부정되고 부패한 삶을 반대하다 결국 영국왕 헨리 8세에 의해서 교수형을 받고 사라졌다.
책에는 당시의 정부와 귀족들의 생활을 비판하면서 본인이 꿈꾸던 이상적이고 공정하고 모두가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완전한 세상을 구현하고 있다. 다만 그가 한 가지 무시했던 것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 욕구, 질투, 탐욕이 존재하는 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세상을 표현한 것이기에 그 소설은 말 그대로 지금까지도 현실에 없는 ‘유토피아’가 되고 만 것이다. 물론 책의 저자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쓴 책은 절대 아니고, 자기가 꿈꾸는 세상을 표현한 책일 뿐이며, 유토피아의 세상이 실현 불가능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일 뿐이란 말을 하지만 이 책을 읽어 보면 현세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교훈과 도움을 준다. 그렇기에 이 책은 아마도 명작이 된 것 같다.
이렇게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가면 속에 숨겨진 나 자신을 모르고 살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다면 남을 죽이고 학대할 이유가 전혀 없어진다는 말이다. 나는 원래부터 존재치도 않았고 또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고 나면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가 여러 개의 가면을 매일매일 바꾸어 쓰며 살고 있고, 또 쓰고 있는 가면이 마치 자기인줄 착각 속에 살아간다.
착각이라고 하면 미켈 데 세르반데스의 소설 돈키호테(Don Quixote)가 생각나는데, 그 역시 세상에 만연한 모든 악과 싸운다는 착각 속에서 행동하는 주인공을 그렸다. 그런 주인공의 행동이 코믹하기도 하면서 그 마음 속에 있는 진실과 가식 없는 무모한 행동이 귀엽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위선의 가면을 쓰고 내가 진짜 누군지도 모르며 그렇게 착각 속에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 알게 또 모르게 유행가 가사처럼 모든 것으로부터 매일매일 이별을 맞이한다. 모든 것이 늘 곁에 있는 것 같지만 하루하루 많은 것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친구도 사랑도 젊음도 추억마저도 우리를 떠나며 매일 이별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껴줄 수 있을 때, 사랑할 수 있을 때, 도와줄 수 있을 때를 미루지 말고, 이번 또 오늘이 마지막처럼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순간 순간을 잊고 지나가 버린다.
언제나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아마도 우리 조상들 역시 우리처럼 같은 마음과 생각을 하면서 살다가 결국 후회를 하면서 떠나지 않았을까?
이제 벌써 아침이면 온몸을 움츠리게 하는 쌀쌀한 바람이 마치 곧 찬서리라도 내릴 듯 그리고 이미 노랗게 변해가는 뒷마당에 깻잎과 실하게도 영그는 깨꽃들은 왠지 필자의 마음을 깊이도 조여온다. 팬데믹이 지나고 이자가 오르면서 갑자기 불경기를 맞이하며 더욱 힘들어진 이민생활이 갑자기 서글퍼지기도 하고 또 지난 삶이 후회도 되는 마음이 들면서 왠지 오늘은 필자의 어린 국민학교 시절에 맑고도 깨끗한, 내가 태어난 고향 무심천 물속 모래사장에서 건져낸 올갱이(민물 소라)를 한 사발 잡아오면 어머니가 그것에 된장을 넣고 아욱국을 만들어 주셨던 때가 많이도 그리운 날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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