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C칼럼- 195
(지난 호에 이어)
이미 정해진 운명이란 바로 지금 우리가 함께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고 있는 일이다. 옛날에 만났던 이성들, 그리고 자기가 공부했던 전공, 이전에 하던 일 등, 이 모든 것보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 하고 있는 일 등이 나의 운명이며, 또 바로 지금의 처지가 나에겐 최고였기에 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 정해진 운명 안에서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있지만 때로는 지금의 삶이 너무도 힘이 들고 또 현실이 싫어서 그것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갑자기 대책도 없이 직장을 그만두거나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고 옛 애인 아니면 새 이성을 만나는 등 돌발 행동을 하는데, 그렇게 해서 모두가 행복하고 잘되면 좋겠지만 자기의 행동 때문에 같이 하던 사람이나 가족들이 불행하고 힘들어진다면 그것 역시 본인이 책임질 일이다.
본인의 행복이 가족의 불행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우리가 알고 배운 상식과는 다르지만 우리가 당사자가 아닌 이상 함부로 판단이나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우리에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바로 이 운명이 나에겐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자는 뜻이며, 그것은 내가 사는 동안 나를 좀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시지프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프스가 신에게 반항하는 오직 단 하나의 길은 신이 내린 벌을 계속해서 꾸준히 순종하고 행하는 것이며, 비록 그것이 끝이 없는 영원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필자의 의견엔 그것은 반항이라 표현은 했지만 그것은 실제로 반항이 아니라 굴복한 것이라 판단 되지만 말이다. 다른 말로 표현을 한다면 우리 인간은 때때로 시도는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이미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모두 외길로 가야만 하는, 선택이 없는 우리들인데 누가 어디가 뭐가 잘났다고 감히 남에게 갑질을 하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가난하고 배고픈 때가 없었다면 어찌 풍요로움에 대한 감사를 알 수 있으며, 아픈 때가 없었다면 어찌 건강에 대한 감사를 알며, 공산당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지 알지 못한다면 어찌 민주주의가 좋은 줄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지난 후에 깨닫고 또 후회를 하게 되는데 함께 사는 배우자 역시 옆에서 잔소리 하던 사람이 없어지면 그때야 그 잔소리가 그리워지고 또 고마움을 알듯이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그렇게 또 멍하게 살면서 깨닫고 또 잊으며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벌써 6월 중순이 되었고, 이곳 캐나다에선 최고의 계절이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아쉽고 또 잡아두고 싶기만한 계절이다. 출퇴근 할 때마다 문 앞에 서 있는 라일락나무에서 찐한 향기를 안겨주던 꽃들이 벌써 시들어가는 모습은 매우 안타깝다. 잡을 수도, 멈출 수도 없다 보니 내년에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인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아 울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순응할 수밖에는 없는 피조물의 운명이 아닌가.
사춘기 시절엔 일부러 빗속을 걸으며 상념에 젖어들던 그때의 기분과 지금의 상늙은이가 어쩔 수 없이 빗속을 걸으며 상념에 젖어드는 생각들이 어쩜 이렇게도 다를 수가 있을까?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섭섭한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젊었을 땐 가을철 낙엽 하나가 바람에 굴러가도 서로가 낄낄거리며 폭소를 자아내던 우리들이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낙엽 하나가 떨어져 굴러가면 그것마저도 슬퍼지는 이유를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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