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으로 보이는 야자수가 인상적이었다. LA에 여행을 갔을 때였다. 가느다란 나무의 몸통에 비해서 키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것이 위태로워 보였다. 강한 바람이 부는 날에 자칫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 사고가 날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을 여행 안내원이 눈치챘던 모양이다. 나무를 만져보면 이해할 거라고 했다. 로데오 거리에 다다라서 차에서 내리자 나무부터 만져보았다. 줄기가 쇳덩어리처럼 단단해서 어떤 경우에도 꺾어질 것 같지 않았다. 뿌리는 길기도 하지만, 일년에 오천 개나 되는 잔 뿌리를 옆으로 넓게 내린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LA에서 나무가 쓰러져서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줄기의 단단함보다도 뿌리가 지탱해주는 힘이 더 큰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땅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감행한 것이 캐나다 이민이었다. 아무 연고자도 없는 낯선 땅에 사는 것이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낭만적인 모험 정도로 생각하고 무모하게 도전했었다. 갈 도시를 정하지 못해 토론토냐, 벤쿠버냐를 놓고 두 다리를 뻗어 '어느 곳이 좋을까요' 하면서 점을 치기도 했다. 아무래도 사계절이 있는 곳이 나을 것 같아 토론토로 짐을 부쳤다. 태평양 한 가운데 화물선이 갔을 즈음 누군가 캘거리가 직업 얻기에 유리하다고 했다. 나의 팔랑귀는 해운회사에 전화를 하게 했고, 그 짐을 캘거리로 보내주면 안되겠냐고 부탁하게 했다. 그러나 배가 일단 떠나면 행선지를 변경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민들레 홀씨가 날아다니다가 어딘가에 내려 삶을 시작하듯이 운명처럼 접한 토론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민을 떠나는 나에게 가까운 지인들이 들려준 조언은 '사람을 조심하라'는 거였다. 그 말은 꿈을 가지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는 사람에게 섬뜩한 느낌까지 주었다. 어딜 가든 한국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 텐데 누구든 사리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처음 사귀게 된 부부에게 상처를 많이 받는 일이 생겼다. 믿고 마음을 다 주었는데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인들이 들려준 충고가 그제서야 귀에 들어왔다. 인간 관계에 실망한 나는 캐나다에서는 사람을 사귀지 말고 자연을 친구 삼아 살자고 작정하기도 했었다.
저녁 어스름에 올려다 본 캐나다의 하늘은 환상적이었다. 엽서에서 보았던 이국의 하늘이 물감으로 칠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선명한 블루가 별들을 품고 눈 앞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한국에 살 때 볼 수 없었던 쪽빛하늘과 화려한 노을,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찾아갔던 Bluffer's Park 호수는 실망하고 방황하는 이민자를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자연과 궁합이 맞는다고 생각하며 꽃집에서 1년 동안 일을 했다. 꽃이 가득 담긴 통을 나르는 것은 막노동에 가까웠지만 꽃과 호흡하면서 일하는 시간이 즐거워서 피곤하지 않았다. 꽃 이름도 그때 많이 외워두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글 쓰는 것에 마음을 붙이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스며든 쓴 물도 희석되어갔고 세상 밖으로 몸을 내밀게 되었다.
몇 년 전 얼음비가 토론토를 꽁꽁 얼려놓았을 때, 많은 나무의 가지와 줄기가 그 얼음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꺾여버렸다. 근처 학교 뒷마당의 큼지막한 나무도 꺾이는 바람에 학교측에서 밑동만 남기고 잘라냈다. 얼마 후 봄이 왔을 때 뿌리에서 물관을 통해 올라온 생명수가 원판모양의 잘린 부분에 흥건하게 고였다가 쭈루루 밑으로 흘렀다. 안타까웠다. 뿌리가 끌어올려 주어도 갈 곳 잃은 수액은 방황의 길목에서 흘리는 눈물 같아 보였다.
뿌리는 보이지 않아도 살아가게 하고 지탱하도록 하는 존재의 근원이다. 얼마 전에 아버지를 하늘로 보내드리고 돌아오면서 캐나다에 마음을 붙이고 살기로 결심했었다. 가끔씩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태평양은 나의 이정표였다. 어디에 사는 것이 좋을까. 그러나 부모님이 안 계신 고국은 이제 나를 고민하게 하지 않았다.
올해로 이민 온 지 이십 년이다. 이제서야 마음을 잡고 캐나다에 정착하는 느낌이 든다. 이민 일 세대는 뿌리다. 사막의 야자수가 물이 절실하므로 수많은 잔뿌리를 내리는 것이 그 모습과 닮았다. 살아내기 위해 절절했던 경험들이 이십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숙성되어 내 이민 역사의 뿌리에 들어있다. 이제는 생명수를 끌어올릴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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