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시간

지금은 한국 시간 새벽 4시. 스마트폰에서 CCTV 앱을 찾아 누른다. 모래시계가 잠시 돌다가 흑백 화면이 떠오른다. 벽면에 붙어있는 꼬마전구가 어두운 방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고, 그 옆에서 어머니가 주무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침이 밝아오면 어머니는 네발 워커를 잡고 침대에서 힘들게 내려와 화장대 낮은 의자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얼마 남아있지 않은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길 것이다. 어머니는 늘 그렇게 한다. 거울 속에서 어머니가 보는 얼굴은 어느 때의 모습일까.

 

한 걸음씩 내디디며 긴 세월을 살아오다가 치매라는 복병을 만나면, 시계의 방향은 뒤로 돌아선다. 손님을 태운 시간 열차는 출발하면서 가까운 기억부터 하나씩 지워나가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소복하게 쌓아온 기억의 눈길은 어디까지 지워져 있는 건가. 기차는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40년 전, 어머니 50대 시절의 정거장에 서있는 모양이다. 거기엔 대학생 외동딸, 군대간 아들들, 출장간 남편이 있다.

육십이 넘은 시누이가 "엄마하고 부르면, 어머니는 '언니가 왜 자꾸 나한테 엄마라고 해요? 우리 딸이 얼마나 이쁜데. " 하신단다. 20대 여대생이어야 하는데, 60대 얼굴인 딸을 자신의 언니라고 여기고 있다. 25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건만, "이 양반이 출장 가서 왜 이리 늦게 오냐?". "막내는 언제 휴가 나온대?". 그 때가 어머니에게 가장 행복한 때였을까. 작년 가을부터 기차는 그 시절에 멈춰있다.

 

나를 며느리로 들였던 때, 어머니는 지금의 내 나이였다. 일제 시대, 육이오를 겪는 험한 세대를 지냈어도,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 덕분인지 어머니는 항상 밝았다. 고국을 방문했던 몇 년 전, 가끔씩 찾아오는 건망증 외에 어머니에게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왠지 마지막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시댁에서 지내며 틈만 나면 카메라 속에 이 모습, 저 모습을 담았다.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캐나다로 돌아오던 날, 짐 가방을 굴리며 집을 나서다가 구부러진 복도 끝에서 뒤돌아보니, 열린 문고리를 잡고 서서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후에 들려오는 것은 불길한 소식뿐이었다. 욕실에서 한번 넘어지고 나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을까. 뇌 손상이 따라 왔고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는 바람에 병과 사투를 벌이는 시간을 보냈다. 치매가 가장 두려운 병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같이 지내는 사람들과 소통이 단절되므로 외로운 섬에 고립되기 때문이 아닐까. 점점 자기만의 세계 속에 갇혀버리고, 가족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애달픈 병이라서.

"언니를 아무리 설명해도 누군지 모르겠대요" 전화선을 타고 흘러온 시누이의 목소리에 서운한 감정 한 웅큼이 올라와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그래도 30년 넘게 가족으로 묶였던 인연인데. 잊혀진 사람이 되어버린 나에 대한 연민인지,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어머니는 요양 보호사와 둘이 살고 있다. 서울에 사는 자식들이 같이 모실 수도, 매일 들를 수도 없는 상황이라 CCTV를 설치했다. 5남매가 공유하면서 낮에는 서울에 있는 3남매가, 밤에는 지구 반대쪽에 사는 두 아들네가 화면으로 지키기로 했다. 걸음이 성치 않은 노구인데 또 다시 치명적인 낙상을 하게 될까 우려해서 내린 결정이다.

지나온 세월의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냐는 비현실적인 질문을 가지고 지인들과 농담처럼 가볍게 대화를 나눌 때가 있었다. 누구는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이라 하고, 누구는 나이든 현재가 편해서 좋다고 했다. 비현실을 현실에서 누리게 하니 치매가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합리화하는 비약일까.

 

인생 속엔 간직하고 싶은 장면이 있고,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도 있을 터. 어머니는 징검다리를 건너건너 50대에 머물러 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도 검은 파마 머리에 살집이 적당하게 있는 뽀얀 피부, 눈썹 끝을 약간 치켜 올려 그린 그 때의 모습일 것만 같다.

슬며시 다가와서 문이 열리면 탈 수 밖에 없는 시간 열차. 원치 않는다고 누군들 거부할 수 있을까. 열차는 어머니를 다시 태우고 어쩌면 더 오래 전의 시간을 향해 움직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현실로 되돌아올 수 없다면 차라리 더 젊고 행복했던 때를 찾아가 그 시간을 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점점 더 멀어지는 시간의 거리에 마음이 서늘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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