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것은 실천하며 산다’라는 모토는 머리 속에서만 뱅뱅 돌다가 다시 제 자리에 가서 멈추기를 수없이 하는 이론일 뿐이었다.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인 ‘혼자만의 여행’이라는 항목은 잠시 설렘만을 주다가 용기 부족으로 인해서 다시 그 안에 갇혀 버리곤 했다.
결정을 쉽게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안 해본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스스로 고독을 찾아나서는 여행이지만 그 고독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 두려웠다. 말 할 대상은 없는데 저녁 어스름과 같이 몰려올 것 같은 스산한 마음이 두려웠다. 여자 혼자 왔다는 시선이 두려웠고 낯선 남자가 쫓아올까 봐 두려웠다.
망설임에 종지부를 찍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생활은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지난 겨울,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나를 흔들었다. 집안 일과 직장에서 벗어나 오직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돌아보고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 두려움을 앞선 시점이었다. 여행전문 사이트를 뒤지다가 눈 여겨 두었던 캐리비언의 한 리조트에 선택 단추를 누르고 나니 망설임과 두려움이 차지했던 자리를 설렘이 채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가는 나 혼자만의 여행이다.
가방에 읽고 싶었던 책 몇 권을 넣고 세찬 겨울을 겪는 토론토를 떠나 여름의 한 가운데 있는 쿠바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내 안에 눌려있던 두려움이 또다시 스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호텔로 데려다 줄 버스가 안 오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옆자리의 할머니가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같은 호텔임을 알고는 과장된 액션으로 나를 끌어안는다. 조금 어색했지만 여행의 청신호처럼 여겨졌다.
바다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만족감을 채워주었다. 옥색 물감을 물에 풀어놓은 듯한 빛깔과 우유처럼 하얗고 고운 모래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바닷가에 누워서 하늘을 보면서 혼자 팔 일 동안 마음껏 자유를 누릴 것을 생각하니 기쁨이 벅차올라 이틀 동안은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흘째가 되어서야 가져온 책 중에서 ‘리스본행 야간 열차’를 꺼냈다. 책 표지에 부제처럼 써있는 ‘당신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면’ 그리고 ‘단 한번의 기적 같은 여행’이라는 글귀가 자석처럼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이 소설의 작가는 '파스칼 메르시에'라는 언어 철학자이다. 철학자가 쓴 소설이라 그런지 철학적인 관념을 적절히 제시 함으로서 깊이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많았다. 내용은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의 일탈로 시작된다. 고리타분한 고전문헌학자이면서 학교 교사인 그는 책방에서 우연히 손에 쥐게 된 책 ‘언어의 연금술사’에 매료된다. 모든 일상을 그대로 놔둔 채, 홀린 듯이 그 책 속의 인물을 찾아 스위스를 떠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 열차에 몸을 싣는다. 학교 교장에게 남긴 편지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단 한번, 단 한번 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그 속에 그레고리우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루한 가운데서 살던 그레고리우스는 그 책을 접한 순간부터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굴레에서 벗어 나게 된다. 그를 매혹시킨 책 속의 인물 '프라두'의 삶을 추적하던 중에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알고 이해하게 된다. 나는 어느덧 그레고리우스의 여행에 동행하고 있었다.
작가 메르시에는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늘 선택의 순간을 만나게 되고 결정하고 나면 선택 받지 못한 나머지는 손가락 틈새로 빠져 나가는 모래 알과 같이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선택하고 결정한 길에서 좋은 사람과 공유하고 좋은 책과 공감하는 부분이 많을 수록 삶은 깊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레고리우스의 삶이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만나기 전과 후로 양분되었다면 나의 삶도 이번 여행을 계기로 변화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작가는 '내 안에서 경험하지 못한 부분들은 환타지라는 공간에 머문다'라고 했다. 그 안에 있던 목록 중 하나를 현실에 옮겼다.
여행은 잠시 나를 들어올려 쿠바에 데려갔다가 다시 토론토에 내려놓았다. 그 시간과 공간은 마법처럼 나의 영혼과 마음을 충전시켰다. 좋은 책과 더불어 혼자서 하는 여행은 충분히 사유하며 깊이 나를 들여다보게 함으로서 채울 것만 있는 환경이 되기도 한다. 캐리비안의 리조트 안에서만 지내는 것은 위험한 것이 전혀 없이 안전했고 모든 환경이 나를 편안하게 지켜주었다. 하고 싶은 것은 하나하나 이루며 살자고 가슴을 도닥이며 다짐했다. 수첩 안에서 질식상태에 놓여 있었던 버킷 리스트가 이제서야 기지개를 켠다.
선택을 앞에 놓고 분별만 확실하게 한다면 망설임은 이제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남은 시간은 한정적이고, 누구나 삶의 주인공인 동시에 또한 제작자이기 때문이다.
공감하고 마음이 끌리는 글 귀마다 붙인 스티커들로 책이 무지개 빛이 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혼자 나섰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 마음과 똑같은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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