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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서 살며 사랑하며 -Wild in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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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2
미국과 캐나다, 그 정체성의 차이

 

 

미국과 캐나다, 그 정체성의 차이

 

양경춘

 

 

 

 

 

이민오기전 까지만 해도 캐나다는 미국위에 붙어있는 위성국가 정도쯤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막상 캐나다에 와 살면서도 한동안은 미국과 별 차이를 못느꼈었다. CNN은 물론 미국의 주요 TV프로그램들이 캐나다에서 그대로 같은 시간에 방영되고 있고 인기있는 스포츠는 물론 미국가수들의 대중가요나 할리우드 영화가 가감없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20여년 가까이 캐나다 시민권자로 살면서 미국방문을 자주 해 보면서도 양국의 정체성 차이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과연 미국과 차별화되는 캐나다적인 것이 존재하는가? 토론토에서 몬트리올을 거쳐 퀘벡을 여행할 때서야 비로소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캐나다의 정체성이 미국과 다르다는 것을 조금은 실감하곤 했다. 

 

역사적으로 캐나다는 프랑스와 영국의 핏줄이 섞인 반면, 미국은 영국과 스페인의 피가 섞인 문화적 차이점이 있다. 또한 북 아메리카를 남북으로 거의 양분하고 있는 양국의 정치제도, 지형, 기후, 인구분포, 이민정책, 국민소득, 보유자원 등 다른 점이 있으므로 정체성도 분명히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대미교역 의존도가 높고 북미방공망 등 국방도 미국에 거의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외교정책 등 자국의 정책에 거슬리는 미국의 압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캐나다 정체성의 일부일 것이다. 

 

한 국가의 정체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멸종된 공룡처럼 강대했던 로마제국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우리가 이민와 발 딛고 세금내고 살아가는, 세계에서 두번 째로 넓은 나라 ‘캐나다’와 이웃의 초강대국 ‘미국’의 정체성 차이에 대해 정리해 본다.

 

 

대박을 터트린 “아이 엠 캐네디언” 광고

 

 

 

저명한 사학자 프랭크 언더힐은 “캐네디언은 최초의 ‘반미주의자’이자 가장 이상적 반미주의자”라고 지적한 바 있다. 1968년 당시의 캐나다의 반미감정을 잘 표현해준 말이다.

 

비록 캐네디언들은 대부분 여건상 미국 문화를 향유하고 있을지라도 자신들은 그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 마치 미국인이 겉과 속 모두 노랗다면 캐네디언은 겉보기엔 노랗지만 속은 하얀 바나나처럼……

 

2001년에 ‘골드 퀼’ 광고대상을 수상하고 대박을 터트린 ‘몰슨 캐네디언’사의 TV광고 ‘아이 엠 캐네디언(I am Canadian)’은 대다수의 캐나다 한인들을 포함한 소수민족 이민자들에게도 낯익은 동영상이다. 

 

‘I am Canadian’은 3천3백만 캐네디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일종의 국가정체성을 강조한 공익광고로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는 미국과 다른 캐나다인이다”라는 것이다. 

 

“나는 목재상도 모피상도 아닌 캐나다인이다. 이글루에서 살지도 않고 고래를 먹지도 않고 개 썰매도 끌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이 광고는 세계인들의 캐네디언들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이해’에 대해 정곡을 찌르며 도전한다. “캐나다에는 대통령이 아닌 수상이 있고    미국어가 아닌 영어와 프랑스어를 쓴다”며 캐나다가 미국과 다르다는 것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전쟁을 일으키는)경찰국가를 자처하는 미국과 달리 캐나다는 평화를 수호한다”는 내용이 미국과 차별성을 부각시켜 수많은 캐네디언들을 환호케 했다. 특히 캐나다 국민들의 애국심을 부추긴 것은 이 광고의 마지막 부분이다. 

 

“캐나다는 세계에서(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나라이고, 제1의 아이스하키 국가이며, 북미 대륙 중 가장 좋은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는 국가이다. 

 

내 이름은 ‘조(Joe)’이며, 나는 캐네디언이다” 

 

수많은 캐네디언들은 이 광고에 열광했으며 전문가들도 “역사상 캐나다의 정체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광고”라고 극찬했다. 

 

 

미국 ‘스타벅스’를 물리 친 캐나다의 ‘팀홀튼’   

 

군용기에 실려 캐나다군에 긴급공수되고 있는 팀홀튼 커피 분점시설

 

 몇 년 전 캐나다군 200여명이 소말리아에 파견됐을 때 현지병사들이 ‘팀홀튼’커피를 공급해 주지 않으면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강력히 요구한 적이 있다. 

결국 현지에 캐나다 팀홀튼 본사에서 분점을 설치해 캐나다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던 일화가 있을 정도로 캐나다에선 팀홀튼이 국민커피로 자리잡고 있다. 캐나다의 한 언론기관에서 ‘어떤 커피를 즐겨 마시는가?’ 라고 설문조사를 한 결과 캐나다 국민의 80% 이상이 미국계의 스타벅스가 아닌 ‘Tim Hortons!’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Tim Hortons! Of course! Hey, we're Canadians”

 

캐네디언이기에 팀홀튼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캐네디언들에게서 자국의 제품을 사용하고자 하는 애국심의 발로를 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의 쟁쟁한 커피 브랜드 ‘스타벅스’를 물리치고 팀홀튼은 국민 커피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캐나다 하키선수 이름을 딴 ‘팀홀튼’에는 캐나다 국민의 사랑과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팀홀튼 광고에서는 ‘True Canadian, It's Tim Hortons’ 등 민족적 자긍심을 연상시키는 문구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캐나다 문화를 미국 문화에 흡수시켜 인식하는 세계적 편견 때문일까? 캐나다 국민들은 자국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팀홀튼의 마케팅에 상당히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용광로와 모자이크

 

 

 

미국은 문화적 배경이 다른 이민자들을 모아 용광로에 넣고 다시 녹여내 하나의 ‘미국 정신’으로 만드는 ‘용광로’문화라면, 캐나다는 영어와 불어 이중언어를 쓰며 이민자들의 복합문화를 존중하는 ‘모자이크’문화로 표현된다. 한편 많은 미국인들을 만나보면 캐네디언들을 시골사람들로 생각하며 캐나다를 자기네 변방의 한 주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캐네디언들은 비록 미국과 유사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지만 미국인들과는 확실히 다른 자신들만의 그 ‘무엇’을 갖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다수의 캐네디언들은 캐나다가 미국보다 인종차별이 덜하고, 안전하고, 자연환경에 애착을 갖고 잘 보전하고 있으며 삶의 질이 더 높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앵글로 색슨계의 뿌리를 공유하며 건국 역사가 200여 년 밖에 되지 않는 캐-미 양국의 정체성의 차이를 정확히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미국과 달리 캐나다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평화적 방식으로 자치국가를 이루어 냈다. 이로 인해 캐네디언들은 스스로 미국인과 달라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어서 캐네디언으로서의 독자적인 정체성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짧은 역사를 가진 캐나다는 고유 문화가 아닌 영국계와 프랑스계 등 복합 다중의 문화 기반 위에서 형성됐고 초강대국이자 인접 국가인 미국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새뮤얼 헌팅톤에 따르면 한 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인종, 민족, 언어와 종교를 포함한 문화 그리고 이념 등 네가지를 들고 있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로 정착한 미국의 경우 인종과 민족의 개념은 이제 의미가 퇴색해 더 이상 정체성 요소로서 변수가 될 수 없다. 

문화의 변수도 퇴색해 가고 소련의 경우에서 보듯이 원천이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이념만으로 묶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같은 앵글로 색슨계의 뿌리로 비슷한 시기에 북미주에 이웃으로 개국한 미국과 캐나다, 양국의 정체성 구성요소는 무엇이고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애증이 교차하는 이웃 - 갈등과 화해의 역사 

 

캐나다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을 비방위로 접하고 있는 이웃 국가로서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역사적, 문화적 뿌리와 배경이 비슷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캐네디언들은 “당신은 미국 사람과 같다”는 말을 싫어하며 자신들의 문화적 독창성을 지키려 애쓰고 있다.

 

영국을 뿌리로 둔 두나라는 각각 왕당파와 독립파의 갈등으로 인하여 북미주에서 미국과 캐나다로 분리되었다. 또한 캐나다는 건국은 물론 국가 운영과정에서 영국 세력과 프랑스 세력 간의 충돌로 미국보다 훨씬 복잡한 국가를 구성하게 되었다. 과거 일부 미국 정치인들과 언론은 북미 전역이 미국 통치하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었다. 이들은 “캐나다인이 싫어서가 아니라, 캐나다가 영국의 식민지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었다.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으로서 바로 이웃에 또 하나의 영국 식민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캐나다인들은 자신들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의 거만함이 비위에 거슬렸다.

 

미국과 캐나다는 건국 초기에 소위 ‘잊혀진 전쟁’이라 불리는 ‘1812년 전쟁’을 치러 상대국 수도인 오타와와 워싱톤을 각각 점거해 크게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캐나다-영국-원주민을 주축으로 한 영국령 캐나다 연합군이 승승장구하던 신생 강대국 미국의 수도 워싱톤을 침공하여 대통령궁을 불태워 버린, 미국으로서는 사상 최대의 치욕의 역사도 있다.

 

 

                불타는 미국대통령궁 1812(그림)

 

이 후 미국 대통령궁을 재건하여 하얗게 페인트를 칠해 지금까지 ‘백악관(White House)’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후부터는 캐나다와 선린외교로 절친한 친구관계가 됐지만 미국은 ‘1812년 전쟁’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1812년 전쟁’에 대해서는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캐나다와 달리 미국측에서는 침묵하고 있어 ‘잊혀진 전쟁’이라 불릴 정도이다.  

 

한편 1차대전 중인 1917년 캐나다가 심각한 재정난을 겪을 때 미국이 도움을 주기도 했다. 토머스 화이트 캐나다 재무장관은 미국의 재무장관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우리 생애에선 캐나다와 미국은 항상 좋은 이웃이었다. 물론 때때로 말다툼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항상 서로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법적 자유에 대한 시각,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해 양국 국민들의 생각은 비슷하며, 세계의 다른 어느 국민들보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한다”고 말했다. 함께 ‘북미’를 구성하는 국가로서 서로 돕고 살자는 화이트의 메시지를 받은 미국은 서슴치 않고 재정지원을 전달했었다.

 

1917년의 이같은 진실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는 있다. 역사학자 그래냇스틴은 ‘1812년 전쟁 이후 양국이 100년 이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신화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최근 위키리크스의 공개 문서를 보면 이웃 사촌을 넘어 형제같이 오누이같이 친밀한 관계로 보이던 양국관계도 볼협화음이 있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미 국무부에 보낸 캐나다 주재 미국 대사관의 기밀 전문에 따르면 캐나다가 갈수록 미국을 불신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알려졌다. 이는 상호 교역 규모가 연간 5천억 달러를 넘고,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을 비방위로 공유하고 있는 두 나라,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함께 군대를 보내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혈맹의 나라로서는 놀라운 현상이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9년째 집권하고 있는 캐나다 보수당의 스티븐 하퍼 수상은 올해 1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2기 취임을 축하하는 공식 성명서에서 “ … 우리 두 나라 사이의 오랜 협력 관계는 많은 공통점에 의해 정의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최대의 무역 관계와 세계에서 가장 긴 비방위 국경 및 자유, 인권과 법에 상호 헌신하고 있습니다. 캐나다와 미국 관계의 성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  라고  현재 양국의 밀월관계를 공식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개별 현안에서는 캐나다 원목 수출, 국경 출입, 오일수송용 파이프라인 건설 등 여러 문제로 부딪히고 있으며 현재도 끊임없이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캐나다 스티븐 하퍼 수상이 팀 홀튼 커피를 마시고 있다

 

 

역대 캐나다 정부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며,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과 내면적으로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표면적으로는 국민 정서를 고려, 적당한 긴장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캐나다의 정치가들은 미국과 항상 친한 관계를, 그러나 너무 친하지 않은 관계처럼 보여야 함을 잘 알고 있다. 캐-미 두 나라는 한ㆍ일 관계나 한ㆍ미 관계와도 비슷하게 애증이 교차하는 복잡한 관계라 할 수 있다.

 

 

미국과 협력하며 겨루는 이율 배반적인 캐나다?

 

캐나다는 제국적인 통치 지배에 저항하며 싸워서 쟁취한 미국의 독립과 달리 저항하지 않고 타협하는 중도노선을 취한 특이한 역사를 갖고 있다. 캐나다의 국가적 자아개념은 1세기에 가까운 영국 식민지 시기를 거쳐 1867년 영국으로부터 평화적으로 자치정부를 획득한 이후부터 정립되어 왔다. 

 

캐나다의 정체성은 사실상 1차 세계 대전을 통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으며 1965년 이전까지의 캐나다 정책은 미국과 협력하면서 동시에 겨루는 이율 배반적인 것이었다. 그러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확대해 나가자 그 때까지의 캐나다의 상대적 열등감은 도덕적인 정당성을  바탕으로 우월감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더그 비어즐리는 “캐네디언들은 뚜렷한 국가 정체성을 원하지 않는다. 대부분 돈과 평범함을 숭상하는 이 냉담한 나라는 국가 정체성에 대한 열망마저도 그저 일시적인 국면인 듯 한 세대에 한 번 몰려왔다가 바위투성이 해변을 쓸고 나가는 따스한 파도인 듯 여길 뿐이다”고 주장했다.  한편 마가릿 애트우드는 ‘캐네디언,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에서 “캐네디언 한 사람이 느끼는 것을 미국인들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캐나다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미국의 정체성과 어떻게 다른가? 캐나다는 미국과 다른 그 무엇이 과연 있기나 한 걸까?  

 

 

‘오 캐나다’와 ‘성조기여 영원하라’

 

캐나다와 미국의 애국심을 비교할 때 두 나라 국민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국가(國歌), ‘오 캐나다’와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자주 거론된다.

 

 

 

 

성조기여 영원하라 The Star Spangled Banner

 

동이 트는 오늘 새벽에도 

 

어젯밤 석양 빛 속에도 가슴깊이 환호하고 있던 깃발을 자랑스럽게 본다.

 

그 누구의 광활한 띠이며 빛나는 별들인가.

 

우리를 감싸는 성조기는 치열한 전투중 우리가 사수한 성벽 위에서도 의연히 나부끼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며 작렬하는 포화와 치열한 폭탄 속에서도 우리의 성조기가 우뚝 서 있음을 우리는 보았다. 

 

오! 자유의 땅, 

 

용감한 백성의 땅 위에 

 

성조기는 지금도 휘날리고 있다.

 

Oh,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

 

What so proudly we hailed at the twilight's last gleaming?

 

Whose broad stripes 

 

and bright stars thru the perilous fight,

 

O'er the ramparts 

 

we watched were so gallantly streaming?

 

And the rocket's red glare, the bombs bursting in air,

 

Gave proof through the night that our flag was still there.

 

Oh, say does that star-spangled banner yet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오 캐나다 O Canada

 

 

 

오 캐나다!  

 

나의 고향이자 선조들의 땅.

 

왕들의 명령속에 진정한 애국심.

 

타오르는 가슴으로 조국의 비상을 보노라,

 

강하고 자유로운 진정한 북녘의 나라여.

 

저 광활하고 넓은 오, 캐나다! 

 

우리는 그대를 지키러 일어서리!

 

신께서 영광스럽고 자유로운 우리의 조국을

 

지켜 주소서.

 

오 캐나다! 

 

우리는 그대를 지키려 일어서리!

 

오 캐나다! 

 

우리는 그대를 위해 지키려 일어서리!

 

O Canada! 

 

Our home and native land!

 

True patriot love in all thy sons command.

 

With glowing hearts we see thee rise,

 

The True North strong and free!

 

From far and wide,

 

O Canada, we stand on guard for thee.

 

God keep our land glorious and free!

 

O Canada, we stand on guard for thee.

 

O Canada, we stand on guard for thee.

 

 

내셔널하키리그(NHL) 경기가 열릴 때 관중석을 보라. 미국응원석은 흥분에 들떠 미국 국가(The Star Spangled Banner)를 부른다. 연주소리와 국가를 부르는 가수의 목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다. 관중들의 우렁찬 합창과 열기가 경기장을 압도한다. 반면 캐나다 응원석에서는 ‘오 캐나다’를 부르는 가수의 노래소리와 연주소리만 요란하게 들리고 관중들은 마지못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립싱크하듯 입시늉만 내거나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을 본다. 이것이 진정 두 나라의 애국심과 국민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현장일까?

 

어떤 사람들은 다민족국가인 모자이크식 캐네디언들보다 용광로로 녹여 동화 정책을 펴는 미국 국민들이 더 애국적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미국 국가는 곡 자체가 열정적이고 고음이 많은 반면에 캐나다 국가는 기도하는 듯한 서정적 분위기의 노래라서 그렇다고 반론을 편다. 사실 미국국가가 템포가 빠르고 고음인 점도 있겠지만 캐네디언들은 미국인에 비해 보수적이며 소극적인 기질 차이가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을것이다.

 

캐나다의 국가인 ‘오 캐나다(O Canada)’는 1880년 몬트리올 근교의 베르세즈 출신 피아니스트인 칼릭사 라발리가 퀘벡을 방문했을 때 당시 캐나다의 총독이었던 론 경과 부인 루이 공주에게 의뢰받아 작곡한 곡이다. 프랑스어로 된 원래의 가사는 훗날 퀘벡 주 법원장이 된 아돌프 바질 루티에르 경이 쓴 시이다. 영어 가사는 원래의 시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1908년 몬트리올의 법관이자 기록관이던 로버트 스탠리 위어 경이 새로 쓴 것이다.

 

한편 미국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The Star Spangled Banner)’에는 자유와 용기에 대한 예찬이 잘 나타나 있으며 미국인들의 개척자적 기질을 요약해서 표현하고 있다. 자유를 찾아 용감하게 북미주로 건너 온 미국인들의 건국 역사는 그들의 문화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가깝고도 먼 우방, 같지만 다르게 !

 

국가 정체성이란 ‘한 개인이 속한 국가와 민족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 및 신념체계’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특정 국가에 소속감을 느끼고 국민의 일원으로서 유대감을 자각하고 있다면 국가 정체성이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 종교사가 에르네스트 르낭은 ‘민족’이 성립하기 위해선 ‘구성원들의 소속 의지’가 필수조건이라고 했다. 인종, 언어, 역사, 종교 등 객관적 요소보다는 ‘함께 살려는 주관적 의지’를 더 중시한 것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퓌스텔 드 쿨랑주가 “조국, 그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 것도 비슷한 관점이다. 이런 국가 정체성은 현실 속에서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로 나타난다.

 

미국과 캐나다는 다민족이 모여 형성된 국가들이다. 따라서 한국처럼 혈통으로 구분할 수는 없고 공통의 국가적 가치관을 공유하면 국민으로 인정한다.

미국의 경우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개인의 노력으로 성공을 위한 욕구, 행복을 추구하는 믿음 등의 가치가 정체성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캐나다는 영어-프랑스어 두개의 공용어 정책, 정부의 사회보장제도, 복합문화주의, 아이스 하키, 평화유지전통, 인도주의 등의 가치가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한 국가로서 세계 속에서 영속하기 위해선 반드시 그 어떤 정체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미국적인 것이 있다면 캐나다적인 것도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존재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미국’, ‘아메리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것으로 보이는 ‘캐나다’, ‘캐네디언’의 정체성은 ‘용광로’와 ‘모자이크’의 차이이기도 하다. 한 해 25만여 명 씩 캐나다로 줄을 이어 들어오는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 계속 자기네 문화만 고집한다면 캐나다의 기존 정체성은 약화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다민족간에 타협하고 다름을 서로 인정해 주고 화합을 바탕으로 상호 존중해 나가면서 ‘아메리칸’과는 또 다른 진정한 ‘캐네디언’만의 고유한 다문화 정체성을 발전시켜 나간다면 ‘캐나다’의 장래는 더욱 밝아질 것이다.  

 

 

 

이민자들의 원래 문화를 용광로에서 펄펄 끓여 ‘아메리칸’ 무쇠로 개조시키는 미국식 실용주의가 강력하기는 하다. 그러나 다민족들이 모여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며 어울려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어 내는 ‘캐네디언’식 예술작품도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

 

 

*위 글은 토론토 영락교회에서 비영리 목적으로 발행하는 "영락"지 2013 가을호에 동시에 게제되었음.

*사진출처:구글

 

 


 

 
 
 
 
 
 

http://blog.daum.net/torontokenny/18338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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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6
두개의 캐나다를 꿈꿈다--퀘벡분리주의
두 개의 캐나다를 목표로-- 퀘벡 분리주의

 

 

 

글 | 양경춘 (Kenny Yang)

 

 

 


 

 

대부분 집집마다 골치덩이가 하나씩은 있듯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히는 캐나다에도 태생부터 안고 있는 문제 하나가 있다. 바로 캐나다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꿈꾸는 퀘벡 분리주의이다.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영국계 연방주의자들과 프랑스계 퀘벡 분리주의자들의 갈등이 마치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관계처럼 골이 깊다. 최근 퀘벡당이 10여 년만에 다시 집권에 성공함으로써 현 캐나다 연방제를 놓고 불어권 퀘벡 분리주의자들과 영어권 연방주의자들 사이에 팽행한 긴장이 다시 조성되고 있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과 ‘풀레 프리 켄터키’>

 

 

세계 7대 선진국 중 하나인 캐나다에 이민와 살면서 주류사회의 두 뿌리 영국과 프랑스의 이질적인 분위기와 마주칠 때마다 사실 아직까지도 색다른 감정이 들곤 한다.

 

 

이민 초기 토론토서 몬트리올로 여행갔을 때의 황당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킹스턴을 경유해 몬트리얼로 이어지는 401고속도로가 퀘벡주 경계에서 갑자기 20번으로 바뀌는가 하면 몬트리올에서는 교통표지판과 간판들이 불어로만 쓰여 있어 애를 먹었다. 다행히 ESL과 함께 기초불어 교육을 받고 있는 초등학생 아들의 도움으로 표지판의 지명과 동서남북 방향을 간신히 해독하며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다. 몬트리올 시내에서 숙박을 위해 호텔을 찾으려고 전화번호부 책을 뒤져도 온통 불어뿐이라서 마치 프랑스에 왔나? 착각할 정도였다.

 

 

점심때 시내를 돌며‘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찾으니 ‘Kentucky Fried Chicken’ 이나 ‘KFC’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퀘벡 주에서는 기존 영어이름도 불어식으로 바꿔야 판매허가가 나오기 때문에 ‘풀레 프리 켄터키(Poulet Frit Kentucky: PFK)’로 표시하고 있었다. 토론토에도 진출해 있는 ‘레드 랍스터 (Red Lobster)’는 불어식으로 이름 바꾸기를 거절해 매장을 닫았다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반면 정부의 각종 문서는 물론 가전제품 메뉴얼도 이중표기법에 따라 반드시 영어와 불어로 함께 제공하도록 되어 있어 불어를 쓰지 않는 다른 주들에서는 엄청난 낭비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영연방 국가의 일원으로서 ‘한지붕 두가족’으로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캐나다의 독특한 현실인 것이다.

 

 

<영국계와 프랑스계는 한일관계?>

 

 

영국계로부터 억압받던 불어권 퀘벡주민들은 자신들의 언어, 종교, 문화적 전통을 간신히 인정받긴 했다. 그러나 소수의 영국계 주민들이 퀘벡의 경제권을 장악해 상류층을 형성하고 다수의 불어계는 하류층으로 전락하게 되자, 프랑스계는 그들만의 고유한 정서를 유지하고 주로 영어권인 타 주와 차별화하는 데 주력했다. 퀘벡주를 캐나다로부터 분리독립시키자는 운동을 전개해 자신들의 의지와 힘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Je me souviens’ 얼마나 서러웠으면 수백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퀘벡인들은 ‘나는 기억한다’ 라는 뜻의 이 모토를 자동차 번호판에까지 새기고 다닐까? 1759년 영국군과의 7년전쟁시 퀘벡의 아브라함 평원에서 패배했던 프랑스군이 치욕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뜻에서 유래한 말이다. 불어를 사용하는 퀘벡이 영어권으로부터 항상 독립하고 싶어하는 것은 한국역사에서 일본의 식민지배 시기를 상기시킨다.

 

 

최근 캐나다 주류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다시 부상하고 있는‘퀘벡 분리주의’의 배경과 현실, 그리고 실현가능성에 대해 알아본다.

 

 

 

 

 

 

 

<1812년 잊혀진 전쟁 게너낙퀘이 전투>

 

 

1812년 9월 21일, 깊은 밤 온타리오 주 킹스톤 시 동쪽의 게너낙퀘이(Gananoque) 근교에 수많은 인적들이 어두운 풀숲 속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미 육군 벤자민 포시스 대위가 이끄는 100여 명의 노스 캐롤라이나 소총부대였다. 그들의 목적은 게너낙퀘이를 점령함으로써 세인트로렌스에 주둔한 캐나다측 대영제국연합군의 보급을 끊는 것이었다.

 

 

“탕! 탕! 탕!” 드디어 미군측의 첫 총격으로 두 신생국가의 사활을 건 전쟁이 시작되었다. 캐나다측에서는 스톤 대령이 지휘하는 민병대들이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격을 감행한 미군은 오히려 민병대의 총격에 다수의 사상자가 났다. 스톤 대령이 소수병력으로 승리해 캐나다측 대영제국연합군 보급로를 지켜낸 것이다.

 

 

게너낙퀘이 전투는 바로 캐나다 군대의 본격적인 첫 전투였고 이 전투 이후, 비로소 캐나다가 국가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2년 동안의 처참한 전투로 수많은 희생을 치룬 두 국가는 1814년 12월 겐트서약을 맺고 공식적으로 전쟁을 끝냈다.

 

 

1812년 전쟁을 통하여 앙숙관계였던 캐나다 내 영국계와 프랑스계가 처음으로 협력하여 미군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다. 이 전쟁은 캐나다 연방 출범의 긍정적 신호탄이 되었고 그 후로 캐나다로 이민 온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캐나다인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커다란 의미가 있는데 왜 ‘잊혀진 전쟁’으로 불릴만큼 조용한가? 미국측으로선 현재의 우방국인 영국과 캐나다와 치른 전쟁이기 때문에 되새겨 봐야 득이 되지 않고 더구나 대영제국과 캐나다 민병대들이 자기네 수도 워싱턴으로 쳐들어와서 백악관을 불태워 버린 치욕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반면 1812년은 캐나다에 있어서는 굉장히 의미가 깊은 해로 부각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영국계, 프랑스계 및 원주민계 모두 합심하여 미국의 침략을 막아낸 캐나다 최초의 승전이었기 때문이다. 캐-미간(정확히 말하자면 영국령 캐나다와 신생국 미국간)의 1812년 전쟁 200주년인 2012년에 캐나다 하퍼 정부는 이를 기념하는 여러가지 행사를 대대적으로 주최함으로써 영-불계의 국민통합을 격려했다.

 

 

 

 

 

 

 

<퀘벡당 집권으로 분리논의 재점화>

 

 

캐나다 10개주 중 유일하게 공용어로 불어를 사용해 리틀 프랑스라 불리는 퀘벡주는 지난 해 9월 4일 주총선에서 분리주의를 기치로 내건 퀘벡당(PQ)을 제1당으로 선택함으로써 다시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추진할 것인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퀘벡당은 전체 125석 중 54석을 확보해 50석의 자유당을 누르고 집권당으로 등극했으며 폴린 마르와 당수가 퀘벡주 수상이 되었다. 주총선 승리 기념 연설에서 마르와 신임 주수상은 “퀘벡의 장래는 독립국가가 되느냐에 달려있다” 라고 선언했는가 하면, 최근 “모든 퀘벡 주민들은 불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밝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퀘벡주에서는 지난 1980년과 1995년에 연방정부로부터 분리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가 두 차례 실시됐으며 1995년 투표에선 1% 포인트도 안되는 간발의 차이로 부결된 바 있다. 이번에 새로 출범한 퀘벡 주정부는 연방정부와의 자치권 협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분리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조기에 추진하겠다고 공언하며 약 80%를 차지하는 프랑스계 주민들의 여론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편, 퀘벡당 집권이 확정된 날 밤 11시경 마르와 대표가 몬트리올 시내 메트로폴리스 극장에서 승리 연설을 할 때 한 괴한이 총격을 가해 45세 남성 1명이 숨지고 30대 남성이 크게 다쳤다. 마르와 대표가 수백 명의 지지자 앞에서 영어로 연설을 시작하고 퀘벡은 독립주권 국가가 돼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 나온 직후 극장 뒤편에서 총성이 터져 나왔다. 체포시 범인은 불어로 ‘영국계가 깨어나고 있다’고 외쳤다.

 

 

<영국계에 의한 프랑스계 식민지배>

 

 

캐나다에서 티격태격 여러 차례 반복되던 영-불간 전쟁은 1758년에 시작된 ‘7년전쟁’을 통하여 영국이 프랑스를 누르고 최종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신 프랑스 시대’가 끝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영국군은 프랑스보다 두 배가 많은 3만 명의 병력과 30여 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퀘벡시를 3개월 동안 공격했다. 최후 전투는 퀘벡시의 아브라함 평원에서 전개 되었으며 프랑스 사령관 몽캄장군이 전사함으로써 영국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파리조약과 함께 프랑스인의 지배는 끝이 나고 영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패전 후 대부분의 프랑스 귀족, 관리 그리고 고위 성직자들은 소유하고 있던 모든 자산을 정리하여 프랑스로 돌아간다. 또 일부는 영국인의 탄압을 피해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또는 서부로 이주한다. 하지만 여전히 6만 여명의 프랑스 이주민들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농부들로서 역시 같이 남아있던 하위 성직자들이 그들을 돌보게 된다. 이들이 현재 퀘벡주를 비롯한 캐나다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5~6백만 명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조상인 셈이다. 영국인의 지배는 개척민인 프랑스인들에게 고통스러웠다.

 

 

두번째 퀘벡 역사의 전환점이 된 1763-1773년 동안, 퀘벡은 영국의 무자비한 통치하에 들어가 공공기관에서는 불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무역은 영국인만이 하게 되었고, 영국 법만을 사용해야 했던 퀘벡 주민들은 피정복자로서의 서러움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1774년 퀘벡헌장 제정으로 퀘벡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은 불어를 말하고 가톨릭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게 된다. 영국 왕실에서 취한 이 조치는 퀘벡의 불어권 주민들이, 대영제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킨 미국인들을 따라 스스로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취한 일종의 유화정책이었다. 영국인들이 실용주의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소수 집단인 불어권 퀘벡인들은 미국의 독립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게 됐다. 게다가 당시 사회 경제적으로 우월한 영국계 퀘벡인들과 비교하여 열세의 위치에 있던 불어권 퀘벡인들은 독립을 주장할 만한 결집된 힘을 갖추지 못했었다.

 

 

<두개의 캐나다 - 로워, 어퍼>

 

 

한편 1770년대로 들어서면서 미국의 독립 전쟁으로 다수의 영국 왕당파들이 캐나다로 도피해 오자 영국령 캐나다는 이들을 환영하였다. 이들은 거주할 수 있는 영토를 요구했고 캐나다는 이들을 온타리오 지역에 거주시켰다. 왕권지지자를 포함한 영국계 캐나다인들은 원하던 대로 프랑스계인 퀘벡인들과 떨어져 살게 됐다. 자연히 로워 캐나다와 어퍼 캐나다로 분리돼 지금의 퀘벡주와 온타리오주를 형성한 것이다. 퀘벡은 일정 부분 자주성을 부여받아 불어 사용, 프랑스 문화 보존, 그들의 주종교인 가톨릭을 자유롭게 믿을 권리를 회복할 수 있었다.

 

 

 

 

 

<캐나다, 다시 하나로!>

 

 

그러나 한 국가 내에서 이러한 이중 체제는 1840년에 막을 내리게 된다. 몇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온타리오주의 재정 적자가 퀘벡주에 비해 심하여 연방정부에서는 두 지역을 통합하여 이 문제를 해소하려고 했다.

 

 

둘째, 1832 년에 시작한 이른바 ‘퀘벡 애국자 반란’으로 인한 보안 문제였다.

 

 

셋째, 미국의 침입에 대한 방어 대책의 이유로 두 개의 캐나다는 다시 하나의 캐나다로 통합된다. 1840년대부터 미국과의 합병 문제가 대두되고 또한 광활한 캐나다의 동서부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아울러 국가발전에 필수적인 인구 증가 및 영토 확장을 통한 시장확보 등을 위하여 1867년 드디어 퀘벡, 온타리오 그리고 노바스코샤, 뉴 브런스윅 및 PEI로 구성된 새로운 캐나다가 탄생했다.

 

 

1867년 영연방 북미주법(BNAA)에 따라 퀘벡을 포함한 각 주정부는 광범위한 자주권을 부여받았다. 연방정부는 국방, 외교, 화폐, 우체국 등 캐나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통치권을 갖는 대신 주정부는 지역경제개발, 교육, 보건, 문화, 의료서비스 등 주민의 사회복지 관련분야의 행정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주정부 통치권의 상당 부분이 연방정부로 이양되었다. 퀘벡인이 큰 관심을 보였던 전국적인 불어사용 문제는 온타리오주의 반대에 부딪혀, 원칙적으로 불어가 국가적 언어지만 그 사용은 퀘벡주에 국한되었다. 1867년의 연방체제는 퀘벡주의 자치권 행사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속적인 영어권 캐나다의 통치는 퀘벡인의 소득수준을 온타리오에 비해 27% 낮은 수준으로 끌어 내리고 결국 퀘벡 경제의 침체를 불러왔다.

 

 

<‘조용한 혁명’과 ‘퀘벡의 기적’>

 

 

1763년 영국 식민지로 편입된 프랑스계 퀘벡은 영어권 캐나다의 억압 아래 퀘벡인의 정체성을 잃고 열등감에 시달리며 자치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심한 상대적 빈곤 속에 빠진 비극적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60년 퀘벡 자유당 당수 쟝 르사지 수상이 정권을 잡은 후 퀘벡의 판도가 달라졌다. 이른바 ‘조용한 혁명(Quiet Revolution: Revolution tranquille)’이 시작된 것이다.

 

 

조용한 혁명을 통하여 퀘벡주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개혁을 이루었고 불어권 퀘벡인의 자존심을 다시 찾았다. 불어권 퀘벡인들은 이 혁명을 통하여 자신감 회복, 정체성 재확인 및 정치적, 기술적, 행정적 능력을 확보하게 됐다. 형편없이 낮았던 퀘벡주의 경제수준은 이웃 영어권 온타리오주를 따라잡고 ‘한강의 기적’에 비견되는‘퀘벡의 기적’을 일궈냈다.

 

 

 

 

 

 

 

<영국계가 프랑스계에 약점 잡혀>

 

 

영국계에 지배받던 프랑스계는 마치 일제의 만행같은 탄압을 받아 프랑스어 사용금지, 프랑스 문화금지 그리고 영국식 체제를 강요당했지만 자존심 강한 퀘벡의 프랑스인들은 엄청난 저항을 했다.

 

 

때맞춰 이웃 신생 미국에서는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고통받고 있는 퀘벡의 프랑스계에 러브콜을 보내 ‘함께 영국을 상대로 싸우자!" 고 권유했다. 퀘벡의 프랑스계는 전의를 불태우며 미국과 함께 탄압하던 영국계에 맞서 싸우려고 했다. 그 때 영국계 캐나다측에서 아주 달콤한 조건을 내세웠다.

 

 

‘미국에 동참하지 않고 우리와 협력하면 불어 사용과 프랑스 문화 다 인정해 줄께!’

 

 

영국령 캐나다측이 제안한 것을 퀘벡인들이 받아들임으로써 영국계 캐나다는 그때부터 퀘벡인들에게 항상 약점을 잡히면서 지금껏 살고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캐나다’ 가능한가?>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불어를 공용어로 쓰는 퀘벡은 최근 분리주의 정당을 제1당으로 받아들였다. 2012년 9월 열린 주의회 선거에서 퀘벡의 분리독립을 요구해 온 퀘벡당(PQ)이 지난 9년간 집권해 온 자유당을 제치고 제1당에 등극한 것이다. 퀘벡당이 집권하게 됨으로써 분리독립 추진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퀘벡당은 캐나다 연방정부로부터의 자치권 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으로 보이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주민들의 반발을 발판으로 분리독립 주민투표의 조기 실시를 모색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연방정부는 퀘벡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등 융화정책을 취해 왔지만 퀘벡은 1980년에 이어 1995년에도 연방정부로부터 분리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등 대응해 왔다. 그러나 두 차례 주민투표는 각각 19%, 1% 표차로 부결됐다. 향후 주민투표를 다시 해도 주민들의 태도가 변수가 될 것으로 보여 가결될지는 미지수 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편 퀘벡주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캐나다 국민 대다수는 만일 퀘벡주가 주민투표를 통해 궁극적으로 독립적인 자치국가를 구성하는데 찬성할 경우에 캐나다 연방으로부터의 분리는 이루어져야 하며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유대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전국적으로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퀘벡주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캐나다인들은 퀘벡주의 독립 분리투표에서 분리주의자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단지 과반을 살짝 넘는 51퍼센트의 찬성만으로는 부족하며 이보다 더 큰 차이로 승리를 거두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과연 퀘벡공화국을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주민투표 논의만 무성하다 그칠 것인가?

 

 

캐나다 주류사회에는 명백하게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그리고 서로에게 질 수 없는 독립적인 자존심 두 개가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퀘벡당의 집권으로 ‘캐나다가 결국 쪼개 지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가 있으나 일부에서는 퀘벡 정치인들이 분열주의를 부추겨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동안 퀘벡 정치인들의 벼랑끝 전술을 이용한 ‘채찍’작전에, 퀘벡의 분열을 원치않는 연방정부는 ‘당근’을 주며 달래는 관행으로 버텨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번에 퀘벡당이 10여 년만에 집권에는 성공했지만 과반 의석은 확보하지 못해 당장 주민투표로 이어질 가능성은 우려와 달리 비교적 낮은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캐나다 연방은 영국계 주민과 프랑스계 주민들이 캐나다 건국의 주도권을 놓고 수백 년간 치열하게 싸운 역사를 통하여 ‘한지붕 두가족’으로 꾸려가고 있다. 이들이 진정으로 하나의 캐나다로 승화되기까지는 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사진/이미지 출처:Google

 

본 글은 캐나다 '토론토 영락교회'에서 발행되는 계간 '영락'지 2013 봄호(1월27일자)에 동시에 게제되었습니다.


 

 
 
 
 
 
 
kobac
Kenny
48900
7036
2012-08-16
무너지는 성교육- Bill 13에 무엇이 담겼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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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bac
Kenny
48897
7036
2012-08-16
양학선-역경속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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