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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안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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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사관학교졸(1967)
1990년 이민, 캐나다 한의학교졸(침술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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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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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5
동방의 등불

 

 얼마 전 미국 대통령에게 중국 국가주석이 "예전에 한국은 중국의 한 부분이었다"고 말해 잠시 한인의 심사를 불편하게 했던 일화가 있었다(Korea used to be a part of China). 이와 유사한 일이 처음이었을까? 한국사에 몇 번 있었다. 이는 한반도 지정학이 주는 에피소드이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이다.


 얼마 전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기억은 생생한 일이다. 16세기 말 선조시대, 임진왜란 때는 명이 조선을 직접 통치하려 했다. 당시 조선의 요청에 명은 3500명을, 그리고 다시 4만5천명을 지원(1592)했지만, 선조의 무능을 들먹이며, 명이 직접 관원을 파견해 조선을 통치하는 직할통치론을 거론한다. (임진왜란 시기 명의 내정간섭과 직할통치론.한명기)


 남해 3도는 일에 양도하고 그 외 지역은 명이 직접 통치해, 조선을 명의 변방기지쯤으로 관리한다는 복안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모택동과 주중 소련대사간 대담에 이와 유사한 대화가 있었던 듯하다. 당시 중-소간 관계가 소원했고, 이틈에 김일성은 양측을 오가며 실리를 챙기고 있던 참이었다.


 이에 불만이었던 후르시초프는 북-중 관계가 밀착되나 싶어(?) 김일성에게 주중-소 대사가 보낸 전문을 슬쩍 보여주었다. "모(택동)가 북을 식민지. “, "이를 보고, 김(일성)이 화가 나서. ".(필자가 본 글에는 그 전문이 공개되지 않았다).


 19세기, 바다에서 영국을 대적할 세력이 없었고, 대륙에서는 러시아가 육군강국으로 일어나고 있을 때이다. 대륙세력은 한반도가 해양세력이 침공하는 다리(교두보)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고, 해양세력(일)은 한반도가 자기를 향한 비수와 같다고 생각해서(일본근대사.피터두우스), 두 세력은 서로 한반도를 선점해야 한다고 봤다.


 이는, 동물세계의 원칙인 "약한 동물은 강한 놈의 밥"이라는 약육강식이 국가 간에도 버젓이 적용되던 당시 피할 수 없는, 지정학 때문에 생기는 식민지화의 한 조건(필요)이다. 그에 더해, 정신 못 차리고 우매하게 행동한다면, 이는 스스로 식민지화의 한 조건(충분)을 추가시킴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필요 충분 조건을 스스로 갖추어 나라를 잃는 예가 세계적으로 한 둘이 아니다. 이제 세계 11위의 경제, 군사 강국이니 우리에게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방심도 금물이다. 최근 사드 관련 중의 태도를 보라!


 15세기 이전, 중국이 명나라 시절에는, 세계의 강국이었으나 그 후 쇠망의 길을 걸어 청나라말인 19세기엔 무려 7나라(미, 영, 불, 소, 이태리, 독일, 포르투갈)에 땅을 떼어주고 분할통치를 받는다. 농경국가가 산업화된 나라의 먹이가 된 것이다. 


 와신상담 모택동, 등소평을 거쳐 시진핑에 이르니 신강대국이 되어, 지난시절 유럽 강대국이 그러했듯이 중국 또한 강대국의 횡포를 부리려함과 다름 아닌 사드의 횡포다. 역사는 반복되는데, 그 가운데 자강만이 문제해결의 길이며, 생존과 민족 번영의 길이다. 


 더하여, 고종 때 일이다. 러시아는 당시 대륙세력으로 해양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영국은 해양세력으로 인도, 중국을 식민 분할통치하고 있어, 두 세력이 동아세아에서 대치, 견제하고 있던 중이었다. 영국은 러시아가 모스코바-블라디보스토크 간에 대륙횡단 철도를 착공하는 등 아세아 진출을 숨기지 않고 있어 필경 조선에 진출하리라 보고, 이를 미리 막고자 조선의 남단, 태평양 입구의 작은 섬(거문도)을 점령해 기지화 하고자한다.


 몽매간에 이것도 모르고 있던 고종은 뒤늦게 청의 통보로 알게 된다. 거문도를 점령하고 2년,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에 진출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철수한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 한반도는 외세에 피곤하지만. 그러나 한반도를 하늘이 준 황금의 땅으로 바꾸어, 동방의 등불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소 강대국으로, 작으나 탄탄한 나라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하면 똑같은 지정학적 설명으로 한반도는 양쪽의 Love Call을 받는 황금의 땅이 되고, 해양으로 대륙으로 세계로 나아가는 교통 중심지, 동방의 등불이 되어 황금알을 품은 축복의 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진핑이 뭐라 했다고 해서 섭섭할 필요가 없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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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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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3
2017-06-08
비미(Vimy Ridge)전투

 

 서론


 19세기 말, 세계는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쟁탈전이 극을 이루고 있었고, 이어 20세기에 들어 그들간에 두 진영으로 나뉘어 정치적, 군사적 연합으로 서로연결, 상호 견제와 힘의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 유럽의 여러 나라는 자국 예산의 50% 이상을 군비에 투입, 군사력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유독 독일이 신흥 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라예보에서 유라시아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비르디난드)를 저격, 발칸에 불을 지피니,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인 독일이 개전, 동맹관계로 연결된 여러나라가 연이어 참전, 세계대전으로 확대된다.(1차 세계대전)


 먼저 독이 중립국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이하 불)를 공격하니 영국이 참전한다. 독은 불원간 러 또한 참전하리라 보고, 군사력 대부분(80%)을 서부전선, 불에 투입, 러가 참전하기 전에 신속히 불점령을 마치고, 대러전을 펼친다는 단기전을 염두에 둔다.


 그러나 독이 벨기에를 넘자 영이 불과 연합해 독의 남진을 막고, 동부전선에서는 러가 생각보다 일찍 개전을 선포하니, 독은 피하기를 원했던 두개의 전선을 동시에 대처해야하는 상황이 됐다.


 상황이 힘들어지자 독은 서부전선에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동부전선에 힘을 집중하기로 한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북단, 비미 능선에 요새화 된 전선이 형성됐다.


 불과 영은 이를 회복하려 했으나, 진지가 요새화된 탓에 이를 돌파치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캐나다는 옆 나라 미도 개입을 꺼려하는 전쟁이었으나, 영연방으로서 자동적으로 영군의 일부가 되어 전선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이렇게 캐나다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그리고 캐나다군은 1917년 부활절에 독일 점령지 비미(Vimy Ridge)에서 대승해 실지를 회복한다. 캐나다에 있어서 비미전투는 전승 이상의 국가형성 의미를 갖는다. 비미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는 안내 책에는 "The Birth of a Nation" 이라는 부재가 달려있다.

 

 본론


 당시 캐나다 정규군은 3000명, 각 지역에 산재된 방위군이 6만 명이었다. 영의요청을 받자 각 지역 방위군에서 지원자를 받는다. 대체로(60%) 영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이 옛 고향에 간다는 생각에 자원, 주 일회(토요일) 행진연습 수준의 군사훈련을 받았던 이들을 영에 보내 정규훈련을 받게 한다.


 1915(Ypres), 1916(Summy), 두번의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이는 영연방군으로 편입, 영(또는 불) 지휘관 밑에서 전투했기에 눈에 뜨이는 성과도 없었으나 비미전투는 처음으로 캐나다군만으로 4개 사단(3만명)을 구성, 캐나다장군(줄리안 빙)의 지휘를 받기로 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당시 전선의 주 모습은, "돌격"을 외치며 달려오는 적을 참호에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가, 기관총을 난사하는 식이었다(진지전).


 방어선 전면에 두껍게 깔아놓은 철조망 탓에 이를 가로질러 돌격하기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다. 독이 이를 해결코자, 참호속의 적을 향한 화염방사기, 가스탄을 개발한다.


 가스탄은 바람이 다행히 적진 쪽으로 불어준다면 매우 효과적이었다. 특히 탄약과 포대를 운반하는 군마는 마스크를 씌울 수도 없어 그대로 피해를 봤다. (Vimy 전투 중 독일 군마 5000 두가 사망, 후퇴시 포대를 후송하지 못했다.)


 영은 철조망을 신속히 절단하기위해 신형 포탄을 개발한다(접촉신관, 106 fuse 탄). 각 참호와 참호를 연결, 전후좌우로 신속히 이동할 수 있는 진지전이 1차대전의 주 전술이었고, 적의 포화를 피해, 임시대피, 부상자 치료, 탄약 , 식수보관, 지휘 통신소 보호를 위해 지하 땅굴(tunnel)을 팠다.


 때로는 적지 안까지 땅굴을 파고 폭탄을 설치, Vimy 전투시 개전과 동시에 이를 폭파시켰다.(지금도 대부분의 땅굴에는 폭발되지 않은 탄약이 있어 출입금지).


 Vimy는 불 북부의 평야지대에 동서로 뻗은 능선으로(145고지), 이를 점령하면 먼거리까지 적 동향을 관찰할 수 있어 군사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우선 두 번의 전투경험을 살려, 새로운 전술을 개발한다.


 종전에는 점령목표, 전투방법 등 전투계획이 통상 지휘관(소대장)까지만 전파되어, 전투 중 지휘관이 사망하면 문제가 생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km에 이르는 독의 전선을 항공으로 사진촬영, 각 병사에게까지 자기소대가 점령해야할 적진의 상황, 포대 위치 등을 교육하고, 적진 모형을 만들어 수 주간 공격연습을 반복했다(항공사진 4만장을 병사에 배포). 


 또, 영 1개 포병사단의 지원으로 중포, 전술포를 종전보다 3배 배치했다. 공격은 9일 아침 5시30분이었으나 2주전부터 계속 포사격을 가해 이미 독일 포대 대부분이 파괴됐다(80%).


 공격은 영 포병 탄막사격의 탄착점이 매 3분마다 60 미터씩 전진하고(rolling barrage), 그 뒤에 보병이 탄착점의 전진 속도에 맞추어 진격하는 식이었다.


 캐나다 병사는 탄막사격 뒤를 가까이 따라가면 됐고(creeping barrage), 독군은 영 포병의 폭격을 피해, 지하 땅굴에 피신, 지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매몰되는 수가 많았다(2만명 행방불명).


 "Mac Dowell 대위는 피신하는 독 병사를 따라 땅굴로 들어갔다. 이미 전세의 위급함을 알고 있던 독 병사에게 항복을 설득, 장교 2명, 병사 75명을 포로로 잡는다." 대위는 소령으로 현지 승진, 훈장을 받는다(Victoria Cross).


 1917년 독은 이미 전 전선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Vimy 지역의 예비병력(제 8군)은 이미 타 지역으로 이동됐고, 평시 260명 수준의 중대는 150명으로 축소 운용되고, 많은 포 역시 동부전선으로 떠난 상태였다.


 이미 1개월 전 독 사령관(Von Fasbender)은 영불의 군사력 증강을 간파, 공격을 예측하고, 지원을 요청했으나, 독일 참모본부는 이미 지원해줄 병력이 없는. 상태였다. 3일간 전투 후 독은 후퇴한다(8만 사망).

 

 결론


 독립은 했다지만, 아직도 영 식민지 정서 속에 있던 캐나다가 영의 요청에 의해 참가한 전투였으나, 비미 전투는 캐나다군만으로 4개 사단을 구성, 캐나다 지휘관 밑에 이루어낸 승리였기에 군에게 새로운 긍지를 심어 주었다.


 "이제, 우리는 영연방의 일원이 아니라, Canadian" 이라는 일체감을 일깨워 주었다. 당시 보병 대위였고, 전후 신문기자가 된 Gregory Clark는 비미 전투에서 캐나다의 민족의식이 탄생했다고 술회했다.(There were Canadians and I experienced my first sense of Nationhood).


 제국주의 탐욕이 일으킨 1차 세계대전 참여였으나, 캐나다는 전쟁 참여를 통해, 전국에서 모인 병사가 처음으로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나니, 우리는 캐네디언이라는 동족의식, 민족의식이 형성된 것이다. 올해가 비미전투 100주년이다.


 당시 파리 신문은 비미 승리를 캐나다가 준 부활절 선물이라며0 감사했다.("Canada's Easrer Gift for France"). 불은 넓은 Vimy Ridge를 기념공원으로 캐나다에 영구 기증했다. 사령관 빙은 전후 캐나다 총독이 된다. 훌륭한 군인이었다.


 비미에서 산화한 3,598명에 명복을 빌고, 부상자 7,000명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비미가 준 캐나다 민족의식 발흥을 축복한다(오!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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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58901
10273
2017-06-02
한국의 핵잠수함

 
 

 서론


 백여년 전, 일본이 청일해전에 이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미국은 주필리핀 군정장관 태프트와 일 수상 가쓰라가 밀약으로, 그리고 러시아는 일과 포츠머스 강화회의(1905)에서 일의 조선 지배를 인정해준다.


 일은 이렇게 국제사회에서 신흥 제국으로 인정을 받고, 이러한 정지작업 위에 고종을 퇴위시키고 조선을 강점한다. 당시 유약했던 한반도의 모습이다.

 

 

 


 아는바 미 국무 에치슨이 아세아방어선에서 한국제외를 선언, 한반도 6.25의 한 가지 원인을 제공했다.


 70년대, 닉슨은 "아세아는 아세아가", 카터는 "도덕이 외교정책의 기준" 이라며 미군 철군을 주장한다. 철군은 필경 전쟁을 부를 것이라는 주한미군 참모장 싱글로브 소장의 반대로 겨우 막았지만, 50년 전쯤, 나라가 튼튼하지 못하여 격은 한반도의 모습이다.


 얼마 전, "동맹이다", "파트너다", "동맹-파트너다" 여러 말에 한국은 알잖아 했고, 최근에는 "한국은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고 했다하여 또 한번 언짢아했다.


 한국 경제력이 세계 10위권에 접근하고 있으나, 아직도 만만한 데가 있어 제대로 대접을 못받고 있는 모습이다.

 

 본론


 핵 추진 잠수함을 갖자. 일찍이 참여정부 시절, 한국이 6척의 핵추진 잠수함을 갖는다면 한반도의 전략적 지형을 바꿀 수 있다는 검토를 마쳤다(2척: 작전배치, 2척: 대기, 훈련, 2척: 수리, 정비).


 핵잠의 힘은 은밀성이다. 사드는 몇기를 갖고 있어도 지상에 노출돼 있기에 "나 여기있소" 식이다. 최후까지 살아남아 보복을 확증할 수 있어야 억제력을 갖는다.


 2차 대전 후 프랑스는 미의 반대를 물리치고 와신상담 끝에 핵을 개발한다. 그러나 비교적 작은 국토라 숨기기도 어렵고, 개전 초기 당연히 적의 집중공격 표적이 되어 국토가 초토화될 것이 뻔해, 지상과 공중의 핵을 모두 수중(잠수함)으로 옮긴다(2009). 이로서 국토의 보존과 최후의 보복력을 동시에 확보했다.


 영국도 마찬가지, 모든 핵을 잠수함에 옮겨 놨다. 미는 육, 해, 공에 다 있지만 육상의 전략무기는 전시 필연코 적의 초기 대량공격 목표가 되어 결국 무력화 된다. 반면, 물속 어딘가에 숨어있는 전략무기는 끝까지 생존, 최후의 보복 무기가 되어 조국의 방패가 된다.


 핵잠수함을 갖자.


 아무리 생각해도 육상의 사드 몇기보다, 비슷한 값의 핵잠수함 수 척이 안보에 더욱 효과적이다. 프랑스가 핵을 갖게 되자 미국은 그간의 반대를 접고 우방의 핵 타격력이 증가된 것이라는 관점으로 이를 환영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핵잠 보유는 자유우방국의 안보에 보탬이 된다. 북은 핵을 확보함으로서 비대칭 전력의 우위를 선점했다. 즉, 그간의 재래식 전력의 열세를 만회한 것이다.


 그러나 남은 핵잠을 보유함으로서, 북의 비대칭 우위를 다시 상쇄시킬 수 있다. 한국이 핵잠을 보유할 때가 됐다.

 

 결론


 한국은 3200톤급 잠수함 건조를 시작했다(2015). 2030년까지 9척의 3000톤급을 확보할 예정이다. 북이 SLBM용 잠함 건조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있었음을 고려, 한국의 계획을 앞당겨야한다.


 북은 SLBM 수직 발사대를 설치한다지만 미사일 크기로 인해 선체가 커야하고, 이에 따른 기술적 문제가 있다.


 한국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재래식 미사일을 탑재함으로 4000톤급이면 된다(토마호크급 순항 미사일).


 한국은 이미 수십기의 원전을 운용중이며, 3000톤급 잠함을 제작하고 있어, 핵잠의 확보, 유지가 현 기술력으로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일은 수상함에 핵추진 기관을 운용하고 있고, 4000톤급 잠함을 보유하고 있어, 필요시 두개를 결합하면 된다. 그들 말대로 하룻밤 사이에 핵잠을 보유 할 수 있는 상태다.


 임진왜란시 일을 막아낸 데는 이순신의 리더쉽과 판옥선의 우수함에 기인한 바가 크지만, 이에 더하여 비장의 무기인 몇 척의 거북선이 있었기 때문이다(5-7척).


 임진란의 거북선과 같이 핵추진 잠수함은 21세기, 조국을 지키는 방패가 될 것이다. 통일 후에도 대양해군을 지향해야할 우리에게 이는 필수 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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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nhs
천하성
58560
10273
2017-05-21
명량해전, 어떻게 이겼을까?

 

 

 1. 전국 상황


 임진년, 흉흉한 소문이 조선 장안에 돌았다. 선조는 일본의 의도를 알아보려 사신을 파견했으나 보고가 엇갈리고, 선조는 “설마…”로 판단 하셨는지, 준비가 없었다.


 1592년 4월13일, 일본 각지역 다이묘에서 출발한 군선이 대마도를 거쳐 부산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500여척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0년 통일전쟁을 끝내고 팽창된 군사력을 동원, 약육강식의 이론대로 이웃나라 약탈 전쟁을 시작한다. 조선의 남해관문, 부산진 첨사 정발은 당일 병사의 훈련 삼아 절영도에 사냥을 나간 참이었다. 사냥중 급보에 접한 첨사는 “다시 확인해보라”고 했으나, 다급히 사냥을 멈추고 입성한다.


 그날 저녁, 항복을 권하는 밀사가 접근했으나 이를 물리치니, 다음날 새벽 왜군이 상륙한다. 오전 성은 함락된다. 그로부터 왜군은 북상, 20일 만에 (5월3일) 선조가 떠난 한성에 무혈입성한다. “풍전등화”. 일본의 뜻은 조선의 항복이었으나,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패주하면서, 항전을 계속한다.


 2. 해군상황

 

 원래, 조선의 골칫거리였던 왜구의 노략질이 전라도 연안보다 경상도 연안에서 심했던 관계로 평시 경상해역 해군 세력이 전라 해역 해군의 2배가 됐다. 이에 따라 건조, 보유, 훈련하고 있어야 할 전선의 수도 2배가 됐어야 했으리라. 그런데, 왜란 2개월 전에 부임한 원균이나 그 전임자가 직무유기를 했는지, 도무지 경상해역에 준비가 없었다. 다행히 왜란 14개월 전에 전라 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 제독이 있어 왜군이 침략하리란 소문 속에 실로, 전비태세 전반에 걸쳐 만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부산 해역 방어를 책임진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에 따라 이 제독은 예하의 판옥선 24척을 이끌고 지원 출전한다. 원균의 4척이 합류하여 28척으로 외선 26척을 분멸하는 첫 해전(옥포해전, 5월 7일)을 치른다. 그리고 8월 24일까지 4차례 출전을 통해 10전 10승, 왜란 첫해에 왜선 320척을 분멸(부수고, 태우고, 가라앉힌다)한다. 조선 전선은 한척의 손실도 없다. 조선 땅에서는 왕이 계속 패주하고 있는데, 너무나 대조되는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 이순신(성웅) 제독의 준비


 자고로 준비된 자가 전장(Battlefield)을 지배한다. 성경 이야기 같이 하느님 군대가 싸움을 대신해 주지 않는 한, 승리는 장비, 인원, 전술에서 준비된 자의 것이다. 조선 해군의 완승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조-일 해군을 보자.


 가) 장비


 조선의 주 전선인 판옥선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오던 맹선을 보강해서 임진 100여 년 전에 이미 개발됐다. 맹선에 1층을 더 올려 3층으로, 1층에 노 젖는 군사를 두고 2층, 3층에 총포, 궁수의 배치 공간을 넓혀 화력을 증강 시켰다. 선체 길이는 20-30m, 쌍돛대, 노군 100여명, 사수 20여명, 총포수 30여명(포 16문)으로 총인원 130~160명이 탑승했다. 배는 소나무로, 두께 13cm(12~17cm)가 되어, 삼나무 두께 9cm의 왜선보다 튼튼했고 주 추진 동력이 되는 노와 돛은 왜선의 좌우 16개(외돛)에 비해 판옥선은 좌우 10여개 (쌍돛)를 장착했으나 기동력이 오히려 우수했다. (왜란중 도주하는 왜선을 추적 격파하기를 42척)


나) 인원


 선상근무는 육상근무보다 힘들고, 평시에도 위험부담이 많아 선원 보충은 항시 어려웠다. 첫 출전 때도 출항전일 도망병을 잡아 목을 베어야 했다. (영국, 넬슨 시절에도 런던 밤거리에 술주정군, 불량배를 잡아 선원으로 쓰곤 했다) 그러나 전쟁 중에는 왜군을 피해 이순신 진영으로 모여드는 피난민이 많아, 선원 보충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다) 전술


 왜 해군은 그 뿌리가 왜구, 해적이었고 일본통일 전쟁은 육상중심이었기에 해군이 발전할 소지가 없었다. 임진년 10번의 해전을 보아도, 왜선이 조선 해안에 도착하면, 우선 상륙, 해적 행위(약탈)가 시작됐고, 이 제독은 이런 상황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왜 해군의 주 전술은 승선 육박전(칼, 조총) 이었으나 이 제독은 왜선의 접근을 허락지 않고 유효 사정거리를 유지하며 인마 살상용 편전, 불화살, 장전 등 포를 집중 사격하여 전장을 지배했다. 


 비록 500여척의 왜 해군이 참전했으나 제해권을 확보한다는 개념은 아직 없었기에 육군수송(상륙)이 끝나면 왜선은 각기 소속별로 흩어져 조선연안 해적 행위에 몰두함으로서, 이 제독은 매 접전시 왜선보다 적지 않는 척수로, 거의 무방비 상태의 왜선을 공격하는 상황이 됐고, 판옥선 1척이 왜선 1척을 분멸시키는 데는 1-2시간이면 족했을 것이다. 고로 매 전투는 2-3시간을 넘지 않았다. 제대로 해상 전술이 적용된 경우는 한산대첩시 학익진과 안골포 해전시 장사진(일렬종대) 뿐이다. 이로 보아 이 제독의 주 전술은 근접 포위 집중 사격이라 할 수 있다. 왜군은 완패를 경험한 후 조선 해군과 해전을 금지한다. 추후, 전선을 대형화, 다량화하고 야간 기습으로 판옥선 1척당 5-7척의 왜선을 배치하여 공격한다는 전술을 택한다. 그리고 그 첫 해전이 칠천량 이었고, 왜의 새벽 기습 전술이 주효했다. 

 

명량해전


 조선해군 160척이 왜군의 기습으로 파멸됐음을 이 제독은 백의종군 중 득문한다. 수군통제사의 중책을 다시 받고 이 제독은 전라우수사 배설의 전선 12척이 남았음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이로서 불멸의 결전을 다짐 하셨으리라 생각된다. 왜 해군은 비록 조선 해군의 주력을 수몰시켰으나 이 제독 예하의 10여척이 있는 한 해상병참선의 안전을 기할 수 없음을 잘 아는 터여서, 끝까지 추적에 나선다. 성웅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성웅으로서는 살아남은 십여 척에 국운이 달려있음을, 그래서 추적 함대를 피해 소함대를 어떻게든 보존코자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영을 옮긴다(회령포에서 어란포, 다시 진도 벽파진으로).


 이는 열세한 함대를 보존, 결전의 때를 기다리는 현존 함대의 전략이며, 성웅의 생존 전략이고, 치밀한 계획이었다. 성웅은 다시 한번 해전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코자 명랑해전 전일 함대를 벽파진에서 우돌목 서편, 전라우수영으로 옮긴다. 성웅은 십여척의 세력으로 수백의 왜선을 퇴각시킬 결전의 장을 찾아 기다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간 모든 해전은 경상도 해역에서 있었고, 왜선은 전라도 해역에 진출할 일이 없었으나 성웅을 추적하며, 전라도 지역의 육전을 지원하면서(남원성 전투에 동원) 전라도 진도에까지 이른다. 추적과 피신의 두달이었으나, 9월 16일, 성웅의 정탐선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통과해 우리 함대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자, 결전의 때가 온 것을 안다. 


 성웅은 “적은 숫자로 많은 적을 막기 위해서는 좁은 길목을 택해야” 하는데 그곳이 명량 우돌목 임을 이미 알고 남해의 서쪽 끝단, 진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우돌목: 폭 300m, 길이 2Km, 조류 최대 21Km/H) 300척의 왜 추적함대는 전선(세키부네) 133척을 앞세워 우돌목으로 진입한다. 조류는 왜군에 유리했다(서향). 초기, 우세한 세력이 성웅의 선단을 포위하려는 듯 했으나 오후 1시 조류가 바뀌면서(동향) 왜선단은 조류에 밀려 협수로로 밀려들어가는 형국이 됐다. 성웅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조선 해군은 조류를 타면서 접근, 준비한 전술대로 왜선을 향해 비오듯 화살과 총포를 쏜다. 편전과 장전으로 사살하고, 지.자.현 총포로 격파하며, 불화살로 불질러 버렸다. 오후 2시 왜선은 31척을 잃고 퇴각한다. 이때도 왜군이 시도 하려했을 승선 육박전은 없었다. 조선 해군의 주 전술대로 근거리 집중 사격으로, 우돌목 좁은 수로에 역조로 밀려, 전열이 흐트러진 왜선을 격파했다. 명량해전은 왜군이 협수로를 등지고 배진함으로 스스로 협수로에 몰리는 우를 범했고, “이 순간을 이 장소에서” 기다린 성웅의 승리였다. 활과 포의 특성상, 다수의 전선이 좁은 간격으로 밀집해 있으면 앞에 위치한 전선에, 뒷배는 조준 사격이 불가하다. 뒷배의 조준선(Line of fire)이 앞배에 가리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성웅은 비록 소수이나 일렬 횡대진형 임으로 활과 포의 직선(조준) 사격에 방해가 없다(포위 전술의 이점). 이것이 13척으로 133척을 맞서 31척을 분멸시킨 불멸의 명량해전 설명이다. –성경을 가까이 하는 사람의 눈에는 하느님이 함께 하신– 그리고 그다음 해전, 노량에서 성웅 이 제독은 전사한다.

 

 같은 조선의 수군이었으나, 지휘관에 따라 결과가 달랐다. 같은 조선 민족이었으나, 이순신 밑에서는 연승을, 육상에서는 연패를 보였다. “명량해전: 어떻게 이겼을까?“의 답을 찾고자 하니, 정답이 눈에 선명히 보인다. 그것은 “지도자론”이었다. (참조: 이순신 평전, 이민웅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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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n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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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다음 6.25를 피할 수 있을까?

 

 

가. 서론


 Johns Hopkins 국제대, 한국 관련학 교수(전 미 국무부 한국 담당관)는 북한이 향후 5년(2020년) 핵을 최소 20개, 최대 100개 보유할 수 있을 것이라 예측했다(2/24/2015).


 현재 북은 10-16개 정도의 핵을 보유한 것으로 예측되며, 절대로 핵을 포기하려 하지 않아 갈수록 문제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NY Times).


 북이 1차 핵실험을 하기 전,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상정하고 있을 때는 대체로 영변 정도가 목표였으나, 이제는 장소도 분산되고, 지하화 되어 선제공격으로 핵시설을 제거하기에는 늦었다는 평가도 있다(케리 차관).


 나. 본론: 왜 핵인가?


 1)한반도에 핵이 배치된 것은 제법 오래 전이다(1958년). 주한 미군의 전술 핵이 포대 발사용 등으로 70년대에 상당수 배치됐다. (주: 80년대 이후, 북의 핵개발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견지에서 점차 철수)
 월남이 패망으로 정리되고, 미중 관계가 개선되면서 닉슨의 주한 미군을 대폭 철수하겠다는 통보가 있자 남은 자주 국방의 필요로 핵개발을 시도한다.


 2)북은 6.25 이후 공산권의 원조와 국민의 노동력 동원으로 60년대에는 남을 능가하는 경제성장을 했으나(년 10 %), 70년대 주체사상이 북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자 경제는 김씨 우상화 사업, 군비 증강, 핵개발에 밀려나고, 90년대 소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주: 마침, 미소간 군비 경쟁에 소련이 어려움으로 붕괴되고(1991), 대북 무상 원조도 대폭 감소된다.)


 3)수백만의 주민이 굶어죽는 빈곤 속에 북은 왜 핵에 매달리는가? 


 80년, 90년대에는 북도 자신의 안보 확보 수준에서 핵을 인식했다. 주한 미군의 핵 배치, 남의 핵개발 시도, 이란(후세인), 시리아(카다피)의 최후를 보면서 북은 안보의 불안과 남과의 군비경쟁에서 비대칭으로 우위를 점하려는 생각에 핵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한반도의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는 말을 반복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의 핵개발 이유는 안보였다. 그러나 그 후 몇번의 실험을 거치는 동안 북은 핵보유가 주는 새로운 관점에 눈을 뜨게 된다.


 가)21세기, 세계사에서 특이한 3세대에 걸친 독재 왕정의 유지를 위한 내부용으로, 나)세계의 빈국으로 가진 것이 없을수록 더욱 필요해지는 국가적 자존심 보존의 외부용으로, 이제 핵은 김씨 왕조를 보위하는 포기할 수 없는 북의 자산이 되고 그들 헌법에 "핵보유국“ 임을 명시하기에 이른다.


 그간 몇번에 걸쳐 체제 보장과 북한 주민을 다 먹여 살릴 충분한 대가가 주어지는 비핵화 합의가 있었으나 북이 이를 결국 마다한 점은 핵보유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 결론
 북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국가적 입장은 전략적 침묵이다. 실무급 수준에서는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미국에 있어 북은 중요한 나라도 중요한 이슈도 아니다.


미국의 입장은 

1)북의 핵보유 절대 불가,

2)핵확산 방지이다. 이 원칙하에 여러 노력을 멈추지 않겠으나, 일정 한계선을 넘으면 그때 조치하겠다는 입장이다.


 즉, 1)핵이 정교화, 소량화 되어 장거리 미사일에 탑재가 확실시 될 때(미 본토에 대한 위협의 확인), 2)핵의 국외 반출이 확실히 우려될 때(terrorist, 위험 국가로 이전 확인)


 이때에도 짧은 벼랑 끝 게임은 있겠지만, 결국 다음 6.25는 피할 수 없는 것인지!

chonhs
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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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월맹의 구정 공세

 

 

TV에 비친 참상, 히피에게 반전 명분 

 

 

 1. 배경
 19세기 들어 영.불의 아세아 식민지 쟁탈전에서 영국이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에 기득권을 갖게 되자, 불란서는 18세기부터 카톨릭 신부를 파송하고 있던 월남에 군대를 파견, 식민지화를 시작한다. 그로부터 외세의 수탈, 압제는 2차 대전 중 일본이 잠시 왔다 가고, 불란서가 다시 와 계속된다.


 17도선으로 남북이 갈리고 북에 월맹이 탄생하니, 그들은 수법대로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일당독재를 확립한다. 남은 자유민주주의 초기의 신생 국가가 그러했듯이 사회적 혼란을 계속한다.


 2차 대전 전후 복구에 힘겨워하던 불란서가 물러나고, 세계의 경찰 미국이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를 막고자 월남에 상륙한다. 그리고 1967년, 월남에는 한.미 연합군을 위시한 130만의 군사력을 갖는다.

 

 2. 진행
 월맹군 사령관 지압은 고교 역사선생 출신으로 불란서를 몰아내고, 통일을 염원했으며, 이러한 위기의 전세를 역전시킬 구정 휴전과 그리고 대기습을 계획한다.


 라오스-캄보디아 국경에 따른 호지명 루트에 남으로 향하는 물자수송이 증가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으나, 67년 구정 휴전 때도 기습은 있었고, 접경지의 소규모 충돌이라 그 정도려니 했다.


 승자도 패자도 불명하고, 숲속에서 치고 빠지는 지루한 전투에 7일 휴전 제의는 마다할 수가 없었다.
 남에서 활동 중인 베트콩과 월맹군이 힘을 합쳐, 후방 주요 도시 사이공의 언론시설, 한미대사관, 사령부, 대통령궁, 그리고 미 해병 케산 기지, 비행장을 기습한다. 전후방이 없는 총력전이 한달간 계속된다.

 

 3. 심리전과 히피 문화
 당시 미국은 2차 대전 후 미.소 냉전의 핵 긴장에 지쳐(전쟁 문턱까지 갔던 쿠바사태, 지구를 몇번 파괴시킬 핵 보유) 전후 베이비부머를 중심으로 반전, 평화, 인간성을 추구하는 히피(hippie) 문화가 싹트고 있었다.


 마침, 그때 등장한 TV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장의 모습이 현장 중계되고, 각 가정의 안방에서 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각 가정은 장기판의 훈수꾼같이 전장에 훈수 두는 지휘관(여론)이 됐다. 


 그 첫 방영이 월남전이다. 잠시나마 미 대사관이 점령당하고, 미 해병 기지가 포위 공격받는, 적과 나의 구분 없이 길가에, 대사관 뒤뜰에 나뒹구는 시체를 보며 평화를 사랑하자는 hippie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압은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심리전으로 승리했다. 당시 미군은 500여명 사상했으나, 베트콩은 4만 명의 손실로 거의 소멸된다. 그러나 TV에 비친 몇몇 참상은 hippie에게 굳건한 반전의 명분을 주어 여론의 나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폭격 중지와 평화협정 제의, 그리고 닉슨은 최소 개입 주의, 미군 철수의 수순을 밟는다.

 

 4. 필자 생각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미군 철수, 평화 협정, 그리고 75년 대공세, 사이공 대사관 지붕에서의 마지막 11명 해병 철수로 긴 이야기는 끝난다.

chonhs
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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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1
세계의 핵, 한반도의 핵

 

 

 

<서론>

 


 1910년대 초 필자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운 퀴리부인(폴란드)이 방사선의 존재를 밝혀 핵 이야기를 이 세상에 등장시켰다. 1930년대에 들어 서구의 물리, 화학자들은 핵분열 현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38년 독일 과학자가(오토한) 우라늄 핵분열 현상을 발견한다. 1940년대에 들어 이의 잠재력에 눈뜬 영국이 원자탄 개발을 시작한다. 영국은 독일에 앞서 이를 개발, 선점코자 했다. 그러나 개발에 드는 재원이 만만치 않아 이를 미국에 넘긴다. 미국은 이를 확대, 맨하탄 계획(핵폭탄 개발 프로그램)으로 원자탄을 만들고 히로시마에서 전장실험에 성공한다. 원자탄 기본 이론이 발견되고 6년만이다.

 


<본론>

 


1) 미.영.불의 핵

 


 미국은 스스로도 핵폭탄의 파괴력에 놀라 이것이 전장에서 절대무기라는 것, 핵기술이 확산되어 너도 나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맨하탄 계획에 합류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핵이 군사력의 총화이며 이것 없이는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강박감에 핵 개발에 착수한다. 핵개발에 미국의 지원이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미 의회는 핵의 독점을 선포한다(맥마흔 법). 2류 국가와 이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지원을 확대하다 보면 기술정보가 소련으로 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미국은 초강대국으로 핵을 독점함으로 세계경영을 주도할 수 있다고 본 것이고, 영국과 프랑스는 전후 세계의 재편에 핵 없이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핵개발에 매진한다.

 


 2) 소.중의 핵

 


 1930년 후반, 소련의 과학자들은 그간 활발했던 서구과학자들의 핵연구 발표가 사라지자, 이들이 핵개발에 착수했다는 낌새를 받는다. 그러나 40년대 소련은 미국의 무기를 빌려(대여), 전쟁을 꾸려나가는 터여서, 개발에 착수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 특기를 살려, 스타린은 동생 베리아(KGB총수)를 시켜 개발정보를 수집한다. 맨하탄 계획에 심어 놓은 첩자가 설계도를 빼오기로 하지만 핵개발이 이런 정보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방대한 시설과(200여개의 실험소와 기술인력), 관련 기술력이 없으면 추진할 수가 없다. 

 


 소련은 자본주의 서구에 대항하는 동구 공산권의 종주국으로 핵보유는 두번 생각할 필요 없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무기로서 개발을 시작했고, 냉전중 무지막지하게 핵을 개발, 보유하게 된다.(4600기)

 


 중국 역시, 강대국이 되든지, 또는 강대국의 지위에 핵 없이는 불가하다는 생각에 핵개발에 뛰어든다. 소련은 중국에게 돈도 많이 들고 쉽지 않다는 점과 공산권에서 한 국가만 갖고 있어도 된다는 점을 들어 중국의 핵개발을 막고자 했으나 중의 계속된 요청에 일부 지원을 한다. 즉 수명의 과학자를 보내, 중의 과학자들에게 핵강의를 하면서 “필기하지 마라, 나중에 sample을 줄테니까” 식으로(결국 주지 않았다), 소극적 지원을 하다가 1958년 중소국경 분쟁이 일자, 그간 갖다 놨던 연구 장비를 모두 들고 철수한다. 

 


 이미 서구의 몇 나라와 소련이 핵을 갖고 있는데 중국의 영토와 인구의 크기를 생각할 때 그에 걸맞은 국력을 갖추는데 핵은 중국에게도 두 번 생각할 필요 없는 필수품이다.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한다. 인해전술의 나라 중국이 최첨단 과학기술의 핵무기(원자탄, 수소탄, 핵미사일, 핵잠수함) 개발하는데 900여 개의 연구소가 필요했다. 그만큼 연구하고 투자할 분야가 많다는 것이다.

 


 3) 한반도의 핵

 


 동양의 빈국, 북은 왜 돈도 시설도 엄청 많이 드는 이 사업에 뛰어들었을까? 그동안 여러 번의 6자회담, 북미 접촉에서 충분한 보상, 불가침제의, 체제 보장 등 손해 볼 것 같지 않은 제의를 다했으나, 아는바와 같이 북핵문제는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

 


<결론>

 


 북에게 핵은 대외적으로 자존심이며 대내적으로는 체제 유지를 가능하게 하주고, 경제적으로 핵무기 수출을 자제한다 해도 일부 관련 기술, 부품을 수출하거나, 기술자 파견 등으로 필요한 외화와 기름을 챙길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남 사업이 용이해 질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핵개발은 국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또는 국가 생존(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을 위해 시작됐고 북한 역시 이 점이 초기 목적이었겠으나, 그간 보여준 행태로 보아 지금의 비핵화 불가 목적은 다분히 남을 흔들기 위해서 인 듯하다.(주1)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의 도발은 공공연하게 되고, 사사건건, 거칠게 나오며 남의 전의를 상실토록 공작할 것이다. 또 각종 평화공세가 남의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다. 

 


 이에 고무된 남의 추종세력은 그간 숨죽이던 세력도 합세해서 “때가 성숙 했다”고 빈번히, 공공연하게, 거칠게 행동하지 않을까 한다. 세상에 핵이 소개된 후, 그리고 향후 5년쯤(주2) 한반도의 핵은 그렇게 사용되지 않을까?(주3)

 

(주1)권력(Power)은 확장하려는 속성이 있는데, 핵(또는 핵 Power)도 그러하지 않을까?
(주2)Johns Hopkins 대학은 북한이 향후 5년내 핵을 20~100개 보유할 것이라 예측했다.
(주3)1992년 소련 대통령 옐친이 방한시 비밀 해제된 6.25 관련서류를 선물했는데, 그 중 김일성-스탈린 대화: 북은 평화통일 제의를 계속 내놓을 것, 남이 이를 거부한 후 기습 공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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