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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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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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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8
2024-11-14
'베를린의 여인 (A Woman in Berlin)' (3)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IX)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강간과 약탈은 국가 전체를 흔드는 전략

 

 

 

(지난 호에 이어)

   미망인이 이 집이 마치 들락날락 하는 기차역 같다고 투덜거린다. 이때 무솔리니가 교수형을 당한 소식이 들린다. [註: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는 1945년 4월 28일 게릴라에게 사로잡혀 다른 측근들 그리고 그의 정부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총살당해 죽었다.]

   A 내레이션: 안드레이 소령은 기뻐서 떠났고 그때 아나톨 대위가 나타났다. 우두머리 수컷 둘을 중간에서 만날 때는 죽을 것같이 두려웠다. 소령은 날 강간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의 뜻으로 그에게 맡기고 그의 처분을 따랐을 뿐… 창녀? 아마도 인생에서 한 번 만났을 뿐이다. 사람들은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다. 무슨 의미냐구? 나쁘다는 뜻이다." [註: 아마도 매춘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대가 없지만 평화로운 상황에서는 절대 이런 상황에 있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고, 합의된 성 관계는 매춘과 비슷하지만, 전쟁 상황에서는 도덕적으로 용인된다는 그런 뜻이 아닐까…]

   어느 날 물을 길러 길거리를 걸어가는 A를 부르는 여인이 있다. 바로 친구 엘케(율리아네 쾰러)다. A 내레이션: 엘케의 방문으로 우리는 환호했다. 소령의 당번병이 보초를 서는 동안 평화롭게 그의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좋은 세계다. 여자들이 오랜만에 남편 얘기, 매독에 대한 얘기, 그리고 성생활에 대한 얘기 등을 나누며 가장 중요한 것이 뱃속이라며 파안대소를 하고 떠든다.

   장면은 안드레이 소령이 새 임무에 관한 서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A가 어디로 갈 거냐며 계속 보호해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어디든 나를 필요로 한다고 대답하는 안드레이.

 

 

   내레이션: 특별한 저녁을 같이 보냈다. 즐거운 대화… 그는 감탄했다고 했다. 다른 아무것도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독일인과는 달리 러시아인은 배운 여자를 알아줬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미망인이 A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찾아온다. 러시아군이 통역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내 마을에서 독일군이 모든 아이를 죽였다. 간단히 칼로 찔렀다. 아이 다리를 잡고 벽에 던져서 머리를 박살냈다." 여인이 묻는다. "들었나요? 아니면 봤나요?" 직접 봤다고 말하는 병사. 그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있어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다. 이에 서둘러 도망치는 여인. 뒤에 대고 '속옷을 벗어놓고 왔냐?'며 희롱하는 러시아군.

   거리로 뛰쳐나온 A는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광경을 목격한다. 노파가 굶주림에 허덕이며 음식 쓰레기통을 뒤지고, 또 한 여자는 러시아군에게 끌려가면서 가족이 있다고 말해달라고 애걸하고…

   가다가 안드레이를 만나지만 부하가 부르는 바람에 "구 독일은 끝났다"는 말을 남기고 가자, 홀로 남은 A에게 옆에 있던 마샤가 "그에게 손 벌리지마!"라고 말한다. A는 "그가 내게 왔지, 내가 가지 않았어"라고 말하자 꺼지라고 욕을 하는 마샤. "왜?"라고 묻자 "아내 자격이 안 돼."라고 대꾸하는 마샤. 질투심에 가득 차 금방 죽일 듯한 태도다.

 

 

   이때 방송이 나온다. "베를린 시민 여러분. 1945년 4월 30일 총통(아돌프 히틀러)이 자살했습니다. 그에게 맹세한 여러분의 충성심은 버림받았습니다. 여러분! 총통의 마지막 명령은 베를린 방어이지만 전체 상황이 무기와 탄약의 부족으로 더 이상의 싸움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합니다. 싸우는 매 시간마다 베를린 시민과 부상자의 고통이 연장될 뿐입니다. 이제부터 '베를린 전투'로 인한 죽음이나 희생은 없습니다. 소련군대의 최고 명령에 합의하여 모든 전투 작전을 즉각 중단합니다. 저는 '헬무트 바이틀링' 포병장군이며 베를린 방어사령관입니다."

   [: 베를린 방어사령관 헬무트 바이틀링(Helmuth Weidling, 1891~1955) 장군은 430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51 요제프 괴벨스의 자살 사실을 52 소련군 바실리 이바노비치 추이코프(Vasily Ivanovich Chuikov, 1900~1982) 중장에게 알리고 협상을 했다. 추이코프 장군은 '무조건 항복' 문서로 작성하게 했으며 내용이 당일 아침에 그대로 발표되었다.

   바이틀링 장군은 소비에트 연방 대법원의 군법 판결에 의해 25 형을 선고 받고 블라디미르 KGB감옥에서 복역 1955 1117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한편 추이코프 장군은 1940 12월에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1887~1975) 국민당 총수의 항일전쟁을 돕기 위한 군사자문으로 파견되었던 인물이다. 추이코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등에서 대승을 거두어 1944, 1945 번에 걸쳐 소련 최고의 영웅 타이틀을 수상하였으며, 1955 소련군 원수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영화가 올리버 히르슈비겔 감독의 '다운폴(Downfall, 2004)'이다. 영화에 율리아네 쾰러(Juliane Kohler·59) 히틀러의 정부인 에바 브라운 역으로 출연했다.]

 

 

   이때 장면은 여인들의 절망에 가득 찬 모습을 천천히 살피고 지나간다. 반대로 "8군단 붉은 군대 병사 장교 동지들! 오늘 아침 베를린 수비대가 항복했소. 베를린은 패했소." 이에 거리는 온통 승리를 축하하는 환호 속에 러시아 국가를 부르며 춤추는 러시아군 일색이다. 안드레이, 몽골병, 마샤 등도 마찬가지다. 마샤는 승리를 축하하는 거리에서 냅다 안드레이에게 달려가 진한 키스를 퍼붓는다.

   장면은 생선 넙치 두 마리를 갖고 여자들 아파트로 간 러시아병들이 "한 마리는 히틀러, 다른 한 마리는 괴벨스"라고 말한다. 이 파티 자리에서 안드레이가 피아노를 연주한다.

   내레이션: 항복이다. 오랜 시간 끝에 전쟁은 끝났다. 우리 여자들이 얼마나 기다렸나… 하지만 지금 아주 쓰라린 패배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처참함을 얘기했다. 어떤 섬뜩하고 사악하고 위협적인 기운이 감도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기 싫다.

   안드레이가 일기를 쓰고 있는 A에게 와서 다 끝났냐고 묻는다. 여인은 "불행이 키운 상상력이 두렵다"고 대답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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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120973
9208
2024-11-07
'베를린의 여인 (A Woman in Berlin)' (2)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IX)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강간과 약탈은 국가 전체를 흔드는 전략

 

 

   (지난 호에 이어)

드디어 지휘관인 안드레이 리브킨 소령(유제니 시디킨)을 찾아간 A는 "어제 당신 군인들이 아파트를 급습해 강간을 당했다"고 하자 "들은 바 없다"고 말하는 안드레이. "도우는 게 당신의 의무"라고 말하는 여인. "누구를 도우는 거냐?"고 묻는 소령에게 "그 여인은 바로 자기!"라고 말하는 A.[註: 치오치아라의 '마로크키나테(Marocchinate)' 사건과 같이 지휘관으로서 성폭력을 묵인했지 싶다. 여인은 더 이상의 강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방패막이가 되어 줄 것을 제안한 것이다.]

   어느 날 아나톨 대위(로만 그리브코프)에게 아파트 난간에 있는 폭발물을 치워줄 수 있느냐고 묻는 여인. 그는 독일어로 "당신과 나, 오늘 밤!"이라고 말하자 이에 응하는 여인 ― "당신과 나. 그것 간단하지. 그 순간 맹세했다. 그들 외엔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뭐든 상관없다."

   어느 날 안드레이 소령이 A가 머물고 있는 일제 호흐(울리케 크룸비겔), 프리드리히 호흐(롤프 카니에스) 부부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한다. 수소문해서 찾았단다. 사령관은 없고 안드레이 소령이 대대장을 맡고 있단다.

   대대장의 당번병으로 몽골인이라고 조롱받는 병사(빅토르 잘사노프, 부랴티아 Buryatia 공화국 출신 배우. 부랴티아는 남쪽으로 몽골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 동쪽에 위치한 러시아 연방국)는 여군인 마샤(알렉산드라 쿠릴코바)까지 업수이 여긴다. 마샤는 안드레이 소령을 자기가 책임진다고 말한다. 아마 짝사랑을 하는 모양이다.

   느닷없이 아파트에 있는 안드레이를 찾아온 마샤는 A를 보고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질투심이 났는지 그에게 주려고 갖고 온 비누를 목욕탕에 냅다 내던지고 "베를린은 우리 꺼야!"라고 내뱉곤 뛰쳐 나간다.

   욕실을 나온 A가 침대에 가서 옷을 벗지만 안드레이는 그냥 밖으로 나간다.

 

 

내레이션: "강간은 계속됐다. 그들은 모든 곳 모든 집에 있었다. 우리는 러시아다. 그들에게 봉사하는… 그리고 여성들은 침묵해야 한다. 아니면 우리를 원하는 남자는 다신 없을 것이다. 불쌍한 독일…"

   러시아군이 고함을 지른다. "베를린은 거대한 창녀촌이야! 이것 봐! 전부 갖고 있어! 보석, 돈, 집! 그런데 전쟁을 일으켜? 나쁜놈들!" [註: 여기서 '창녀촌'이라는 말 속에는 '전리품'으로서 '강간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창녀를 강간하면 무죄'라는 남성우월적 의식이 깔려있다.]

   내레이션: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가끔 무엇이든 버텨야 했다. 몸은 굴복하지만 마음은 굴복하지 않는다. 난 잘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러시안은 좋아지고 있다.

   밤에 아나톨이 아파트로 찾아온다. 아나톨은 집시출신이다. 자기 좋을 대로 왔다가 가버린다. 분명 보호자는 아니다. 잘못된 선택이지만 그를 웃음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A.

   한편 다락방에 숨어있는 독일패잔병(제바스티안 우르젠도브스키)이 묻는다. "총통이 우리를 포기했다고 생각해?" 피난민 애인(안네 카니스)이 "아니 절대로!"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 독일병은 권총을 차고 음식을 구해오겠다며 어디론가 나서는데….

 

 

   이즈음 한 미망인(아이알엠 헤르만)이 강간 당한 얘기를 한다. 우크라이나 여자 것은 이만큼 큰데 내 것은 쬐끄만 하다고 칭찬했다고 말해 일행이 박장대소를 한다. 하지만 입냄새가 나더라고 말하는데 문노크 소리가 들린다. 안드레이 소령이 찾아온 것이다. 몽골인이 베이컨, 소시지, 설탕 등 음식물을 잔뜩 갖고 왔다.

   내레이션: 다음날 아침, 근처의 전투는 격렬했고 소령은 부하들과 함께 왔다. 미망인은 고기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꿀벌처럼 활기찼다. 우리의 국민돌격대는 투항 준비를 했다. 정말 기쁘다. 하지만 모두는 아니다.

   호흐 부부집에서 안드레이를 비롯한 러시아군들이 전투에서 독일군을 무찌른 이야기를 하며 병사, 장교 모두들 겁먹고 도망쳤다고 하자 그 중 한 젊은 장교가 이건 주인에게 모욕을 주는 무례한 언사라고 나무란다.

   다른 한 명이 코카서스 산맥에 대해 얘기하며 "태양, 산, 푸른 하늘, 아름다운 춤과 여성! 포도같이 달콤하죠!"라고 자랑하자 A는 "푸쉬킨이 그곳으로 망명했죠."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 러시아군은 푸쉬킨 스타일이라며 노래를 부르고 자기는 아내와 아이들을 원한단다.

 

 

   안드레이가 여인에게 파시즘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파쇼에서 유래, 고대 로마의 막대기 묶음 결속을 뜻한다"고 대답하자 "우리 안주인은 현명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군인들. 미망인이 독일인과 러시아인의 우정을 위해 잔을 들고 건배를 제의하는데….

   이때 바깥에서 무장한 독일군이 음식물을 훔쳐갔다며 무고한 시민을 폭행하는 부하를 안드레이가 흠씬 두들겨팬다. 몽골인 당번병이 달려가 상관을 말리지만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A가 일행에게 살짝 말한다. 저들이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그때 안드레이가 갑자기 여인에게 키스를 하며 으스러지게 포옹하는데…

   A가 독일패잔병이 숨어있는 다락에 올라가 얼른 자리를 피하라고 말하자 독일패잔병은 시베리아로 가긴 싫다고 말하는데…. 안드레이 소령이 누구든 숨겨준 자는 총살형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몽골병이 몽골 특유의 창법으로 노래한다. [註: '흐미 또는 회메이(Khoomei)', 일명 '쓰로트 싱잉(throat-singing)'이라는 창법이다. 숨을 길게 내쉬면서 성대를 울려 입술 모양을 통해 멜로디를 만들어 내는 몽골인의 독특한 기교의 전통 창법으로 마치 'Jew's Harp' 연주처럼 들린다.]

   내레이션: 며칠 동안 소령이 왔다 갔다. 모두의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다. 양초, 담배 그리고 많은 선물을 주었다. 어떤 미망인은 얼른 찬장에 숨겨두었다.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많은 러시아 남자들은 산타 클로스를 좋아한다. 왜 우리 여자들은 막을까? 소령은 유창하게 러시아어로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보다 많이 말해주었다. 그의 은행 계좌, 부모, 형제의 이름도. 전쟁은 격렬했다. 우리 남자들이 시베리아로 추방되는 동안에도 많은 여성들은 보호자를 찾았으나 남겨진 여인들을 위해 침묵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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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120649
9208
2024-10-25
‘베를린의 여인 (A Woman in Berlin)’ (1)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IX)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강간과 약탈은 국가 전체를 흔드는 전략

 



   ‘베를린의 여인(A Woman in Berlin)’은 2003년에 독일에서 익명으로 출간된 수기집을 바탕으로 2008년 독일의 막스 페르베르뵈크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원제는 “익명: 베를린의 한 여인(Anonyma - Eine Frau in Berlin)”인데, 영국에서는 “익명: 베를린의 함락(The Downfall of Berlin - Anonyma)”으로 소개되었고 2009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첫 상영되었다. 
   콘스탄틴 영화사 배급. 출연 니나 호스, 유제니 시디킨. 율리아네 쾰러. 음악감독은 폴란드 출신 쯔비크녜프 프라이스네르(Zbigniew Preisner•69). 러닝타임 126분.
   얘기 시작 전에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도 간략히 나오지만 전체적인 이해를 위해 앞에서 설명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영화를 안 보신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양해를 바란다. 
   독일의 저널리스트였던 익명의 주인공은 ‘베를린 전투(The Battle of Berlin)’ 중간부터 연합군이 승리할 때까지인 1945년 4월 20일 ~ 6월 22일까지 2개월여 동안 노트에 쓴 일기를 바탕으로 1954년에 미국에서 영어로 첫 출간을 하고 5년 후인 1959년에 독일에서도 출간했다. 

 

 

   그러나 익명의 수기집은 독일 여성들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출판 금지 당하여 익명의 저자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발간하지 말도록 조치했다. 여성이기 때문에 수치심을 자극하는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녀가 2001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90세로 사망한 후 2003년에 독일에서, 2005년에 미국에서 또 익명으로 새로이 출판되었는데, 세상이 달라져서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7개 국어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기자들의 끈질기고 집요한 추적 끝에 저자는 나치시대에 독일 신문, 잡지 기자였던 마르타 힐러스(Marta Hillers, 1911~2001)로 밝혀졌다.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주인공인 ‘익명의 여성’이 일기를 읽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1945년 4월 26일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러시아 군대는 베를린을 포위했고 독일 의회당까지 거리 곳곳에 있었다. 구름에 가린 태양을 당신이 봤을 그 날, 버려진 정원에서는 라일락 꽃향기가 퍼졌으리라. 어디부터 시작할까? 적절한 단어는 뭘까? 난 기자이고 12개국을 여행했다. 모스크바, 파리와 런던에서 살았었고, 파리와 런던이 즐거웠다. 그러나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이곳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註: 그녀는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수학했다.]

 


   폐허가 된 거리를 보여주던 화면이 타이프라이터를 치고있는 주인공으로 디졸브된다. 그리고 ‘익명의 여인’의 내레이션이 계속된다.
   “내 이름은 중요치 않다. 난 조국의 운명을 믿었던 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 의심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녀의 약혼자인 게르트(아우구스트 딜)가 말한다. “바르샤바, 브뤼셀, 파리… 끝없는 승리야. 러시아는 지도력이 없어. 재정비될 때까지 모스크바에 있을 거야. 전쟁이잖아.… 방해해서 미안해.”
   내레이션은 계속된다. “게르트는 떠났고 구두소리는 집안을 울렸다. 옳다는 걸 확신했고 모두 같은 공기를 숨쉬며 우리는 취해갔다.”
   장면은 파티장. 독일 기자인 ‘익명의 여인’(니나 호스)이 모두에게 묵념을 제안한다. [註: 이후 편의상 A라고 칭하기로 한다.]

 


   그리고 장면은 퇴각하는 독일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포격 속에 도망치는 사람들이 무수히 죽는다. 그 현장을 지켜보던 A가 다른 사람들을 선도하여 지하대피소로 피신한다. 약사, 음악가 등 중산층의 애달픈 삶을 모두 기록하여 약혼자 게르트에게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는 A!
   폐허가 된 거리에 러시아 홍색군의 탱크가 진입한다. 확성기로 모든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고 방송하는 러시아군. 지하에 숨어있는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이 소리를 다 듣고 있다. 이윽고 독일군과 러시아군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마지막 저항을 하는 독일군을 무찌르고 드디어 해방군으로 도시를 장악하는 러시아군.
   지하대피소로 들어온 러시아군이 민간인들을 일일이 조사하면서 여자들에게 “전쟁 끝! 여자!”라고 독일어로 몇 단어를 말하며 나이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강간을 하자, A가 러시아어로 “뭘 원하느냐? 당신들은 왜 원하지 않는 여자들을 데려가느냐?”고 묻는다. 

 


   배고픔에 지친 여자들이 여기 지하에 묻히기 싫다며 밖으로 나간다. 손수레에 감자가 수북히 쌓여있는 것을 보고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여인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주인공은 어린 여자를 겁탈하려는 러시아군을 유인하여 다른 곳으로 데려가 그를 철창에 가두고 밖으로 나와 상급지휘관을 찾는데, A도 결국 두 명으로부터 윤간 당한다. 


   A의 내레이션: 어느 미망인이 머물 곳을 제공했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놀랍게도 멀쩡했다. 난 받아들였다. 몇 발자국이면 작업실이고 옷, 책, 노트 등을 얻었다. … 좀 더 주변을 살펴야 했었다. 그러나 결코 모든 걸 볼 순 없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흘러간다. [註: 모든 걸 볼 수 없었다는 말은 사실 그 집의 다락방에 독일패잔병이 숨어 있었고, 이로 인해 나중에 파국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군인들은 점령자로서 승리를 만끽하고 밤낮으로 아파트를 뒤지는데, 베를린 시민들은 특히 여자들은 목매 자살하거나 총으로 살해되는 등 누구도 모면하지 못했다. 이제 모든 감정이 죽었다. 
   내레이션: 그들은 어디에 있지? 우리의 구세주? 최고의 군대? 전쟁과 죽음은 남자들의 일이었다. 그 시절은 끝났다. 젠장할 러시아인! 장교, 장군, 사령관 등 상위로 가야 한다. 그리고 나를 선택할 사람을 정해야 한다. [註: 전장에 나가는 남성은 차라리 죽임을 당할지언정, 강간처럼 정신을 말살하는 류(類)의 범죄를 당하진 않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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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120474
9208
2024-10-17
'두 여인(Two Women)' (4, 끝)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II)
두 모녀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양면성 묘사, 연기자 소피아 로렌의 진면목 보여준 작품
 


(지난 호에 이어)
   이에 "아무 일 없었다고 말했잖아요"라고 대답하며 "로마까지 태워줄 수 있느냐?"고 묻는 체시라. 그는 로마는 너무 위험하다며 미군이 들어간 후에 가라고 충고하고, 자기 어머니가 잠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친절을 베푼다.
   플로린도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 모녀. 그러나 밤 사이 악몽에서 깨어난 체시라가 딸을 찾으나 사라지고 없다. 그녀는 미켈레를 찾으러 폰디로 갔거니 생각하고 마을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는데, 한 촌로로부터 뜻밖에 미켈레의 시체가 포르첼로(Porcello)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독일군에게 총살 당하는 것을 누가 봤다는 것이었다. 
   연인이었던 미켈레의 사망 소식에 울음을 터뜨리는 체시라에게 플로린도의 모친이 "부인, 당신 딸은 제 아들과 같이 춤추러 갔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아까 차에서 말한 승전 기념 파티에 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어린애를 데려가다니 당신 아들 죽여버릴 거야!" "당신 딸도 좋으니까 따라간 거지! 강제로 데려갔겠어?" 
   실랑이를 하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체시라.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거죠? 제게 무슨 죄가 있길래…" 전쟁 때문에 행복하고 단란한 한 가정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네오 리얼리즘 장면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모의 자식 걱정과 사랑은 하등의 차이가 없다!
   밤을 하얗게 샌 엄마 앞에 플로린도와 춤추고 몸 팔아 받은 실크 스타킹을 들고 나타나는 딸. 체시라는 격분하여 철없는 딸을 때린다. 그러나 로세타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울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머니가 "미켈레의 말이 맞았어. '아무리 도망쳐도 자기 자신은 피할 수 없어.'… 미켈레 소식도 묻지 않는구나…" 하며 큰소리로 미켈레의 죽음을 알리자 그제서야 로세타는 통곡하기 시작한다. 마치 폭행 당하기 전의 순수한 소녀로 돌아간 듯…. 
   어머니도 같이 울며 모정으로 "엄마를 용서해. 그만 울거라. 내 딸 로세타, 금쪽같은 내 딸! 이제 자!"하며 딸을 부둥켜 안고 위로하는 장면을 줌 아웃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작품으로 외국영화로는 처음으로 1961년 아카데미 및 칸 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22개의 국제영화상들을 휩쓸면서 소피아 로렌(Sophia Loren•90)은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배우가 되었다. 
   그런데 아카데미상 시상식 때 소피아 로렌은 무대 공포증 때문에 직접 수상하지 못하고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1942)'의 주연배우로 유명한 그리어 가슨(Greer Garson, 1904~1996)이 대리 수상하면서 "(소피아 로렌을) 이 야성미 넘치고 재능 있는 여자(This wildly beautiful and talented girl)!"라고 외쳤다고 한다. 
   당시 아카데미상 후보로 올라온 여배우들은 '초원의 빛'의 나탈리 우드,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의 오드리 헵번 등 쟁쟁한 배우들이었는데, 이례적으로 '외국인'인 소피아 로렌이 수상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26세밖에 안 되었던 로렌이 '두 여인'에서 미녀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30대의 어머니로 분장하여 투박하고 강인하며 억척스러운 여성상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딸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놓을 깊은 모정을 온몸으로 연기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피아 로렌의 진정한 연기자로서의 진면목(眞面目)을 보여준 영화가 '두 여인'이었지 싶다. 
   한편 미켈레 역을 연기한 장 폴 벨몬도(Jean-Paul Belmondo, 1933~2021)는 상대적으로 유약한 진보주의자 청년으로 비치는데, 이탈리아 영화에 프랑스 배우가 출연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제작자 카를로 폰티가 자금 조달을 위해 프랑스 회사와 합작했을 때 당시 프랑스 법규정에 의해 프랑스 배우를 반드시 기용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때 장 폴 벨몬도의 목소리는 이탈리아어로 더빙을 한 반면 로렌은 직접 영어로 더빙했기 때문에 영예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1901~1974)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 체사레 자바티니(Cesare Zavattini, 1902~1989)를 만난 것은 축복이었다. 로마 가톨릭 신자인 감독과 공산주의 작가의 만남에 의해 '구두닦이(1946)' '자전거 도둑(1948)' '밀라노의 기적(1951)' '움베르토 D(1952)' 등 주옥같은 네오 리얼리즘의 걸작들을 공동 창출했기 때문이다. 
   데 시카 감독은 감독보다 배우로서 더 많이 활약했다. 예컨대 헤밍웨이 원작으로 록 허드슨과 제니퍼 존스가 주연했던 찰스 비더(Charles Vidor, 1900~1959) 감독의 '무기여 잘 있거라(1957)'에서 알레산드로 리날디 소령 역으로 출연하여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첫 번째 부인 쥬디타 리쏘네(Giuditta Rissone, 1895~1977) 사이에 딸 에미를 낳은 후 1954년 이혼하고 1959년 스페인 배우 마리아 메르카데르(Maria Mercader, 1918~2011)와 재혼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법으로는 이 결혼이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에 1968년 프랑스 시민권을 받자 파리에서 결혼했다. 
   그런데 리쏘네와 이혼하기 전에 마리아 사이에서 벌써 아들 둘을 두었다. 1949년생인 마뉘엘은 음악가로, 1951년생인 크리스티앙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 배우와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참고로 마리아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가이며 마르크시즘 이론가로 유명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를 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했던 라몬 메르카데르(Ramon Mercader, 1913~1978)의 여동생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데 시카는 비록 이혼은 했지만 전처딸 에미가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해마다 성탄절과 새해에는 시계를 두 시간 거꾸로 돌려놓고서는 두 가족 모두 파리에 있는 메르카데르 집에 모여 자정에 축배를 들곤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73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두 여인'은 지금도 오페라 등으로 제작되어 공연되고 있는 걸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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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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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0
'두 여인(Two Women)' (3)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II)


두 모녀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양면성 묘사,

연기자 소피아 로렌의 진면목 보여준 작품



(지난 호에 이어)   
그 후 한동안 보이지 않던 미켈레가 어느 날 나타나 체시라의 뒤를 밟는다. 별 대화 없이 나란히 걷던 둘은 독일군을 피해 마을 부호집으로 찾아가는데 거기서 예기치 않은 독일군 중위와 맞닥뜨린다. 뭐 하느냐고 묻는 중위의 물음에 막 대학을 졸업했다고 대답하는 미켈레. 전공은? 문학이라고 답하자 중위는 로마에서 철학을 전공했다고 말한다. 
   이에 비위를 맞추려고 부호영감이 "그러면 이탈리아인들이 철학을 싫어하는 이유도 당연히 아시겠군요?"라고 거든다. 중위는 엉뚱하게도 "당신 같은 계층은 진수성찬이지만 농부들은 먹을 것도 없다"며 따지자 "보통은 이렇게 안 먹어요. 이건 중위님을 위한 특별한 점심이지요"라며 쩔쩔매는 부호영감님이 "그들이 그렇게 사는 건 그들의 선택이에요"라고 강변하자 "이탈리아의 지도계층인 당신들의 잘못"이라며 "점심 한끼 먹이고 내 입을 다물게 하려는 거요? 난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소"라며 격앙되어 소리치는 독일군 중위.

 

 

   이때 부엌에서 부호마님과 함께 있던 체시라가 이 고함소리를 듣고 뜨끔해 하는데 부호마님이 말한다. "저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야 해. 토요일마다 식사하러 오거든" "저라면 수프에 독약을 넣겠어요"라고 말하는 체시라. 
   딸에게 줄 음식을 싸가도 괜찮다는 호의에 체시라는 설탕, 밀가루 등 닥치는 대로 바구니에 싸 담는데. 이때 칸초네 노랫소리가 들린다. 중위가 부호영감에게 노래를 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마님 할머니.
   이때 부호마님이 깜빡했다며 커피를 갈아달라고 부탁하자 커피를 갈며 노랫소리가 들리는 거실로 가보는 체시라. 담배 연기가 자욱한 거실에서 영감이 노래를 하고 있는 가운데 중위와 미켈레의 대화가 이어진다.    
   중위: 당신들은 선천적으로 전쟁을 좋아하지. 전쟁은 남자의 필수경험이죠. 전쟁 없이는 남자도 없어요.
   미켈레: 차라리 거세를 하겠어요.  
   중위: 역시 이탈리아인답게 감상적이군요. 오늘도 독일의 소중한 병사들은 당신들 대신 피를 흘리고 있어요.
   미켈레: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당신들은 출발부터 잘못됐어요.
   중위: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보시오. 냉철한 머리로! 당신과 이탈리아 사람들은 패배를 해야 정신을 차릴 거요. 당신들 자식들도 피눈물로 그 대가를 치를 거요!

 

 

   독일군 중위가 점점 핏대를 올리자 이를 엿듣던 체시라가 불쑥 나타나 "애들이 무슨 상관이에요? 어서 말해봐요!"라며 "여기 오다가 당신들 때문에 미친 여자를 봤어요. 어디 나한테도 한번 해봐요"라고 삿대질을 하며 대들자 부호영감이 "여자 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말리는데 그때 공습사이렌이 울려 모두들 방공호로 대피한다. 
   체시라가 두고 온 바구니를 챙기러 부엌으로 갔다 오니 무시무시한 공습이 이어지고, 경황(驚惶) 중에 안경도 쓰지 못해 앞이 보이지 않는 미켈레를 이끌고 나오다 둘은 풀밭에 쓰러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풀잎에 예쁜 무당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다. 체시라의 몸을 안고 쓰러진 미켈레는 은연중에 그녀를 더듬고 키스를 한다. 경보 해제 사이렌이 울리자 방공호에서 나오던 부호 부부가 이 광경을 목격한다. 그때서야 안경을 찾아 쓰는 미켈레. 쏟아진 밀가루를 말없이 주워담는 두 사람.
   그러나 이만한 평화마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독일군 패잔병 6명이 마을에 들어와 총으로 위협하며 물과 먹을 것을 요구하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길잡이를 요청한다. 마을사람들이 이를 구경하기 위해 다 모였는데 결국 가장 젊은 미켈레가 험악한 산악지대의 길잡이로 잡혀가게 된다.

 

 

  •한편 연합군의 진격이 시작되고 무솔리니와 독일군의 패망이 가까워지면서 식료품 부족과 더 잦은 폭격 등으로 이 시골이 도시보다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님을 깨달은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옛 거처로 복귀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미켈레의 부모도 여기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들과 합류한다.
   가는 길에서 미군 탱크부대를 만난 사람들은 군인들이 던져주는 껌과 초콜릿 등을 챙기기에 바쁘다. 마치 우리 6•25전쟁 때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탱크 위에 있던 사진사가 체시라를 보고 "다리를 보여주면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하자 "네 누이 다리나 찍어라!"며 야유하는 사이에 독일 전투기 한 대가 아군들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바로 코앞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독일 전투기가 사라지고 평온을 되찾자 사람들은 폰디로 가는 것도 위험하다며 미군이 더 진군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의견과 미켈레 부모는 아들을 찾으러 그래도 폰디로 가겠다고 하고, 체시라는 미켈레를 보러 폰디로 가려고 하는 딸 로세타를 끌다시피 하여 모녀는 로마로 향하는데….

 

 

   뙤약볕 길가에서 모녀가 잠깐 쉬며 싸온 빵을 먹고 있는데 머리에 터번을 두른 무장군인들이 탄 트럭행렬이 지나간다. 그냥 지나간 것으로 보아 연합군인 것 같은데… 암튼 모녀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성당에 들어가 벤치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고 쉰다.
   그런데 그 사이에 갑자기 들이닥친 프랑스 식민지 군대인 모로코 군인들에 의해 집단 강간을 당할 줄이야! 엄마는 금쪽같은 딸의 이름을 부르짖지만… 이때 신성함과 숭고함의 상징인 교회의 성모상 앞에서 윤간 당하는 로세타의 얼굴을 클로스업된 정지화면으로 보여줌으로써 강렬한 충격을 준다.[註: 그런데 정작 이 장면은 당시 '성적 노출 금지' 규정에 대한 무언(無言)의 항변으로 일부러 정지화면으로 처리했다는 후문인데 아무튼 데 시카 감독은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신을 차린 엄마가 딸에게 다가가 부둥켜 안고 눈물로 머리를 빗겨주고 입가에 흘린 피를 닦아준다. 그러나 로세타는 이 처참한 충격으로 더 이상 순진하고 사랑스런 '소녀'가 아닌 '여자'로 바뀌었고, 어머니에게서 점점 멀어져만 간다. 
   모녀가 다행히(?) 친절한 젊은 트럭운전사 플로린도(레나토 살바토리)를 만나 차로 이동하게 된다. 플로린도는 "정말 모로코 놈들과 아무 일 없었냐?"고 물으며 "오늘 아침 근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놨어요. 내 동생을 건드렸으면 다 죽여버렸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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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119064
9208
2024-10-03
'두 여인(Two Women)' (2)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II)
 

두 모녀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양면성 묘사,

연기자 소피아 로렌의 진면목 보여준 작품
 

 

 

(지난 호에 이어)
다음날 새벽 일찍, 잠에 취한 딸을 깨워 다시 여정에 오르는 모녀. 시골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촌로(村老)를 만나 (걷기 힘들어 하는 딸을 태우고 갈) 당나귀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고 묻는데, 그때 로마를 공습하려는 연합군의 전투기 편대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이들을 기총소사(機銃掃射)하여 그만 노인이 즉사한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인 산골마을 치오치아라에 도착하는 모녀. 마침 야외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던 마을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난 모녀를 친척처럼 따뜻하게 맞이한다. 아코디언 연주를 하는 아킬레에게 누군가 '파체타 네라'라는 곡을 요청하자 체시라는 '비베레'라는 곡을 신청한다. [註: '파체타 네라(Faccetta Nera)'는 '어여쁜 검은 얼굴(의 여인)'이란 뜻으로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비공식 국가였던 인기 행진곡이다. '비베레(Vivere)!'는 '살아라(Live)!'란 뜻으로 체사레 빅시오(1896~1978)가 작곡한 1937년 동명의 이탈리아 영화의 주제곡으로, 이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1930~1940년대를 풍미하던 유명 테너 가수 티토 스키파(Tito Schipa, 1888~1965)가 불러 크게 히트한 낭만적인 곡이다.]

 

 

순박한 마을사람들이 영국이든 독일이든 누가 이기든 상관없고 전쟁이나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거기에 참석한 젊고 지적인 엘리트 청년 미켈레(장 폴 벨몬도)는 "만일 독일이 이기면 자살하겠다"며 "파시스트 배지를 달고 있는 여러분들이 원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남들은 죽든 말든 여기서 제 배만 불리면 된다는 뜻이라면 우리는 모두 돼지들입니다"라고 일갈(一喝) 한다. 
이때 누군가 미켈레는 이상주의자라며 정치 얘기로 분위기 깨지 말고 노래나 듣자고 제안하는데….
며칠 후 미켈레는 모녀와 함께 등산을 하면서 체시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짜 무지한 사람들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며 "순수한 농부들은 전쟁 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덧붙여 "지금까지 도시인들이 농부들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어요. 그러나 농부들은 절대 안 변해요"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체시라는 "나는 농부들과 다르게 산 덕분에 조금이라도 돈을 모았다"며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대꾸한다. [註: 옛날이나 지금이나 산업화에 따른 rural exodus, urban exodus 문제는 정치•경제•사회 및 종교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끝없는 논쟁거리이다.]
이때 두 명의 파시스트가 나타난다. 그 중 한 명은 어제 마을에서 본 얼굴이다. 그들은 "무솔리니를 도둑처럼 감옥에 가뒀다"며 "20년 동안 건설했던 제국이 하루 만에 무너졌다"고 분개하다가 "너희 같은 반역자들은 진작에 제거했어야 했었는데"라며 총을 빼드는 게 아닌가. 
미켈레가 나서서 "그게 사실이라면 난 웃으며 죽을 수 있다"며 "어서 쏴라!"고 말하는데, 다른 한 명이 "우리 손으로 죽이기보다는 독일군에게 맡기는 게 낫다"며 말리자 둘은 황급히 도망친다.

 

 

마을에서 나물을 다듬던 여자들 중 한 명이 "무솔리니를 남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화두를 끄집어낸다. 누군가가 "난 무서워서 사랑도 못 할 것 같다"고 하자 체시라가 "불을 끄면 되지" 하고 말해 모두 박장대소를 하는데….
이때 미켈레가 영국군 두 명을 데리고 들어온다. 그들은 작전을 위해 잠수함으로 상륙했다가 패잔병이 되었다고 한다. 만일 독일군에게 발각되면 모두 총살감이라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질 못하는데 체시라와 로세타 모녀가 그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대접한다.
그들을 배웅한 뒤 미켈레는 와인에 좀 취한 체시라에게 아까 포도주를 마실 때 '조반니를 위해!'라며 건배했는데 그가 누구이며 혹시 사랑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사실 그 포도주는 조반니가 선물로 준 비싼 와인이었다. 
대답을 회피하고 "싫은 남자와 평생을, 그것도 매일 밤 함께 자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라고 말하는 체시라.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제라도 새로운 사랑을 갈구하는 듯한 애매한 대답이다. 로세타가 오자 딸을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체시라.

 

 

마을사람들을 거처에 모아놓고 미켈레가 성경을 읽어주는데 들락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말이 자꾸 끊긴다. 또 아킬레가 편지를 전해주자 조반니에게서 온 편지를 읽어본 체시라가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조반니가 붙잡았다"며 소리를 지르며 편지에 키스를 하는 등 도무지 책을 읽어줄 분위기가 아니다. 
이에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간 미켈레를 체시라가 뒤쫓아간다. 그는 대뜸 그녀에게 정직하지 못했다며 그 이유는 "사랑한다"는 말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이때 비가 쏟아져 혼자 뛰쳐가는 체시라. 
잠자리에서 딸 로세타가 "미켈레는 엄마를 사랑해요. 엄마는 너무 예쁘잖아요"라고 말하자 "그는 25살이야. 여자는 연하의 남자와는 안 사귀는 거야"라고 에둘러 대답하는 체시라. "하지만 미켈레는 여기서 제일 착해요" "요즈음은 착한 게 별로 도움이 안돼… 그는 너무 반체제적이야. 착하기는 하지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지. 남편감으로는 괜찮아. 나쁜 습관도 없고… 네가 좀 더 나이가 들면 너와 약혼시키고 싶어!"
죽은 아버지를 닮은 미켈레를 잘 따르며 사춘기적 사랑을 느끼던 로세타는 "무슨 그런 말씀을…"하고 수줍어 하는데 "언젠가는 생각해야 할 일이지." 이에 한바탕 웃는 모녀의 사랑과 행복은 밤처럼 깊어만 간다. 
이튿날 온 마을 사람들이 들과 산을 헤매며 먹을 것들을 찾는다. 우리의 보릿고개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이때 미켈레가 아버지 몰래 집에서 갖고 온 커다란 빵조각을 얼른 로세타에게 건넨다. 그러나 이를 목격한 남자애가 빵을 달라며 보채자 로세타는 그를 업고 언덕 위로 올라가 나눠 먹는다.
한편 체시라는 양치기인 농부를 찾아가 거의 집 한 채 값을 주고 치즈를 사는데, 착실한 기독교도인 척하며 실속은 다 차리는 노인의 행태가 역겨울 정도로 얄밉다. 하지만 전시 체제에서 살기 위한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어찌 탓할 수가 있겠는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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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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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두 여인(Two Women)’ (1)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II)
두 모녀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양면성 묘사 
연기자 소피아 로렌의 진면목 보여준 작품

 

   이번에 소개할 영화 ‘두 여인(Two Women)’은 알베르토 모라비니(Alberto Moravini, 1907~1990)의 소설 ‘La Ciociara’를 원작으로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제목은 ‘치오치아라(에서 온 여인)’이란 뜻이지만, 영어 제목은 막연한 지명보다는 주인공인 모녀(母女)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춰 ‘두 여인’으로 의역한 것 같다.
   그 내용은 물론 픽션이지만 ‘마로크키나테(Marocchinate)’라는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뜻은 ‘모로코인들의 악행(Moroccans’ Deeds)’인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인 1944년 5월19일 프랑스 원정군(French Expeditionary Corps•FEC)의 외인 부대인 모로코 군인들에 의해 이탈리아 치오치아라에서 저질러진 집단 살인과 강간을 일컫는다. 
   당시 FEC 사령관인 알폰스 쥐엥(Alphonse Pierre Juin, 1888~1967) 장군이 용감하게 싸워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던 몬테 카씨노(Monte Cassino) 수도원을 탈환한 모로코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에게 선심 쓰듯 “지금부터 50시간 내에는 무슨 일을 저질러도 벌하지 않을 것이며 그 이유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11~86세에 이르는 2천 명 이상의 여자들이 성폭행 당했으며(어떤 자료에는 7천 명 이상), 800명 이상의 남자들이 가족을 보호하려다 살해 당했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지금 나폴리에서 북서쪽 100km, 로마 동남쪽 90km 떨어진 지점인 카스트로 데이 볼치(Castro dei Volsci)에 ‘치오치아라의 어머니들(Mamma Ciociara)’이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60년 이탈리아 흑백영화. 제작 카를로 폰티, 각본 체자레 자바티니, 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 등 환상의 3콤비가 대본, 제작, 감독한 작품. 러닝타임 100분.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무솔리니 정권하의 혼란스럽던 이탈리아 로마. 30대의 체시라(소피아 로렌)는 남편을 잃은 뒤 식료품점을 운영하며 13살 딸 로세타(엘레오노라 브라운)와 함께 안정된 삶을 찾아간다. 
   그러나 계속되는 연합군의 로마 공습에 시달리자 집과 가게를 남편의 옛친구 조반니(라프 발로네)에게 맡기고 딸의 안전을 위해 로마에서 약 90km 떨어져 있는 그녀의 고향인 산골마을 치오치아라로 함께 소개(疎開)한다. 
   떠나기 전날 그녀와 동침한 조반니는 그 대가로 값비싼 와인 한 병을 선물하고 역에서 그녀를 배웅한다. 

 

 

   열차로 가던 중 철로가 폭격으로 끊어져 복구에 네댓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북새통 열차 속에서 체시라의 풍만한 젖가슴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남자들의 시선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모녀는 차라리 도중 하차하여 걸어서 가기로 한다. 이때 짐가방을 머리에 이기 위해 수건으로 똬리를 만드는 모양이 우리와 똑같다. 
   열차에 타고 있던 젊은 독일군인들이 창밖으로 6개월 뒤인 성탄절이면 전쟁이 끝난다며 신발까지 벗고 맨발로 떠나는 모녀의 이 모습을 보고 ‘안녕’이라고 일제히 인사를 한다. 체시라가 “독일군들도 나쁘지만은 않네!”라고 말하자 로세타도 이에 동의한다.
   모녀는 폰디라는 마을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註: 폰디(Fondi)는 로마와 나폴리의 중간에 있는 정착지로 1950년대 후반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전에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의 중요한 전략지점이었다.] 
   주인여자(안토넬라 델라 포르타)가 보통내기가 아니다. 전쟁 중이라서 절대 싸게는 안 된다며 은근히 얕잡아보자 젖가슴 속에서 돈뭉치를 꺼내 보이는 체시라. 주인여자는 “은행이 따로 없네!”라며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자전거를 수리하고 있는 주인여자의 두 아들이 모녀에게 계속 눈독을 들이는데 두 명의 파시스트가 들이닥치자 급히 도망친다. 알바니아 전선에서 탈영한 두 아들을 찾는 그들에게 주인여자는 이리저리 둘러대면서 수고들 하는데 와인이나 한잔들 하고 가라며 관심을 돌리기 바쁜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편이 와인을 따르곤 무솔리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처럼 부동자세를 취하는 장면이 웃음을 자아낸다.
   두 파시스트의 눈길이 체시라 모녀에게 닿자 주인여자는 얼른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당연히 잠자리는 줘야지요”라면서 “저들은 산테우페미아(Sant’Eufemia)로 가는 길”이라고 대신 나서서 얼른 말한다.
   한 파시스트가 체시라에게 “폰디 마을에는 식량이 충분하지만 산테우페미아엔 밀가루도 부족한데 왜 거길 가느냐?”며 “식당일을 돌보며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딴죽을 건다. 체시라가 “나는 하녀가 아니라”며 거절하자 그 놈은 ‘민병대를 돕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능글맞게 로세타의 얼굴을 쓰다듬는데…. 
   체시라가 그 손을 뿌리치며 “우리가 굶어 죽든 말든 간섭 말라”며 “또 내 딸에게 손대면 죽여버리겠다”고 돌을 집어 들고 거칠게 항의한다. 이에 ‘총살감’이라며 씩씩대는 파스시트들을 주인여자가 나서서 자기가 잘 타이르겠다고 중재하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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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호
118582
9208
2024-09-12
'부베의 연인' (La Ragazza di Bube) (5,끝)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I)
감옥에 간 애인을 기다리는 시골처녀의 애절한 순정 
 

 


(지난 호에 이어)
   "그에게 말은 못했지만 기다릴 거에요. 언제까지나… 당신을 잊지 못할 거에요. 그런 행복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지도 몰라요"라고 말하며 그의 품에 안기는 마라. "헤어져요. 그리고 자기 길을 가요. 이해 해줘요. 난 '부베의 연인'이에요." 이에 스테파노는 말한다. "당신을 잊지 못할 거야. 죽을 때까지."
   장면은 다시 재판정. 치올피 사제가 증인으로 나왔다. 그는 버스에서 있었던 사건을 시인하고 부베가 자기를 살려주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장면은 재판정을 크레인 샷으로 보여준다. 판결이 늦어지면서 어수선한 그러나 최종(유리한) 판결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잘 포착한 명장면이다.

   이때 마라와 부베의 대화.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저버리지 않을 거에요.   
   부베: 알고 있어. 내 편은 당신뿐이야.
   마라: 친구들을 믿어요. 모두 당신 편이니까. 나쁜 건 이 재판정이에요. 결과만 보기 때문이에요.
   부베: 당신이 있어줘서 큰 도움이 됐어. 그렇지 않았다면 목을 맸을 거야. 빚을 졌군. 당신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어. 당신에게는 불행이었겠지만…

 

 

   다시 개정된다. "정신 바짝 차려요. 혼자가 아니니까요"라고 말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마라. 드디어 판결을 내리려는 순간, 컷 되고 장면은 달리는 기차로 디졸브 된다. 
   14년 장기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복역 중인 파르티잔 부베. "처음에 들었을 때는 불안했지만 의외로 담담했다"는 마라는 부베의 연인으로 그가 출옥할 날만을 기다리며 주위의 온갖 유혹도 뿌리치며 이곳 저곳 옮겨 다녀야만 하는 부베를 2주에 한 번씩 만나러 가는 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렇게 7년이 흐른 어느 날, 그녀는 부베를 면회 가는 기차역에서 예전에 청혼을 했던 스테파노를 우연히 만난다. 그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서 두 자녀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스테파노에게 부베와의 약속을 말하자 그는 씁쓸히 마라의 곁을 떠난다.
   "7년 있으면 저는 34살, 부베는 37살. 아직 아이를 낳을 수 있고 결혼도 하고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영화는 기차의 속력만큼 빠르게 바깥 풍경을 훑으면서 끝을 맺는다. 마치 기다림의 시간이 살같이 지나가듯….

 

 

   마라의 이 마지막 대사와 첫장면의 독백은 그 당시 애인을 홀로 두고 군대에 가면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는 말이 유행할 때라, 뭇남성들은 부베의 연인, 마라 같은 여자를 이상형으로 들먹이며 인내하고 기다려주는 순진한 여성상을 강조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만큼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명대사로 기억된다.
   그런데 진작 이 영화가 추억의 명화로 기억되는 이유는 이탈리아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고전적인 사랑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의 마라가 당시 보편적인 우리 한국 여성의 면모와 가치관과 너무나 흡사했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빨치산 활동을 했던 부베를 통해 영화의 시대적 상황과 정서들이 우리나라 해방 후의 사회적인 이념 갈등과 남성 위주의 봉건 사회를 벗어나지 못했던 현실 등과 너무 많이 닮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실화로 밝혀졌다. 카를로 카솔라 소설 속의 주인공 마라는 실존 인물 나다 
조르지(Nada Giorgi, 1927~2012). 그녀는 피렌체의 외곽도시인 투스카니 시골인 폰타씨에베(Pontassieve) 출신으로 사춘기 시절에 파르티잔인 레나토 챤드리(Renato Ciandri)를 만났다. 레나토의 가명이 '바포(Baffo)'였는데 소설에서 '부베(Bube)'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레나토는 1945년 5월13일 폰타씨에베 근교인 마돈나 델 사쏘(Madonna del Sasso)에서 헌병과 그의 아들을 죽인 혐의로 프랑스로 도주했다. 궐석재판에서 19년 형을 선고 받고 체포되어 그동안 서로 서신, 면회 등으로 접촉하다가 1951년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에서 약 90km 동쪽에 있는 도시) 감옥에서 결혼했다.
   레나토는 초지일관 결백을 주장했지만 1961년에서야 석방되어 1981년 11월에 사망했다. 나다는 2012년 5월 24일 바뇨 아 리폴리에 있는 병원에서 85세로 사망했다. 

 

 

   나다는 소설 '부베의 연인'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녀 자신과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유와 남편의 유죄 부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유산을 남겼기 때문. 나다는 남편이 사망한 뒤에 부정적인 요소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비록 성사되진 못했지만 마씨미오 비아죠니에게 두 번째 자서전을 쓰도록 의뢰했었다는 후문이다.
   루이지 코멘치니(Luigi Comencini, 1916~2007) 감독은 1960년 연출한 'Tutti A Casa' (Everybody Go Home)이라는 영화로 이탈리아 영화평론가연합의 '은 리본상 최우수제작상' 및 제2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특별금상'을 수상한 경력을 갖고 있는 명감독이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즐겨 연주되는 '부베의 연인' 주제곡을 작곡한 음악감독 카를로 루스티켈리(Carlo Rustichelli, 1916~2004)는 동갑내기 코멘치니 감독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다. 
   역시 CC가 주연하고 루스티켈리가 작곡했던 1959년 작품 "형사(The Facts of Murder)"의 주제곡인 '죽도록 사랑해서(Sinno Me Moro)'는 그의 딸인 알리다 켈리(Alida Chelli, 1943~2012)가 불러 지금까지도 애창되는 고전이다. '켈리'는 루스티켈리라는 이름이 길어 그냥 켈리로 줄인 예명이다. 
   그녀는 2012년 12월14일에 69세로 사망하여 이제 부녀가 모두 작고했다.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 미오…" 그 곡을 들으면 착 가라앉은 저음대의 중년 여자 같은 농익은 목소리로 들리지만 그녀의 나이 불과 16세 때 불렀던 노래이다. 이 노래와의 인연으로 '아모레 화장품'이 우리나라에 등장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명곡이다. 
   여담이지만 내가 존경하는 선배 한 분은 이 곡 때문에 한국외국어대학 이탈리아어학과를 선택, 진학했을 정도이다.
   영화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이젠 이탈리아, 그리스, 프랑스 등 유럽 영화나 음악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 헐리우드계 상업성에 식상해서인지 예술적이고 서정적이면서도 오래도록 곱씹어 볼 만한 감칠맛 나는 이런 영화들이 그리운 것은 단순히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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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5
'부베의 연인' (La Ragazza di Bube) (4)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I)
감옥에 간 애인을 기다리는 시골처녀의 애절한 순정 
 

   

 

 

스테파노는 시와 소설도 쓰는 문학도이기도 하다. 인쇄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라가 일하는 세탁소가 있다. 스테파노는 마라에게 직장을 알선하여 자기 인쇄소에서 일하게 한다. 둘은 무도회장에서 춤도 추며 가까워진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고 진정한 미인은 마음도 아름다운 사람"이라며 "헤어진 여자 친구는 미인이었지만 기품이 없었다"며 "당신은 나의 운명의 사람"이라고 청혼하는 스테파노. 
   그러나 "이제 그만 만나자"고 제의하는 마라. 왜냐하면 자기는 약혼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청혼을 거절 당한 스테파노가 "약혼자가 없었다면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었겠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하는 마라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자 이를 거절하는 마라. [註: 스테파노 역의 마크 미셸(Marc Michel, 1932~2016)은 '부베의 연인(1963)'에서는 이와 같이 청혼이 거절 당하지만, '쉘부르의 우산(1964)'에서 파리의 보석상 롤랑 카사르 역으로 나와, 전장에 나간 연인 기이(니노 카스텔누오보)의 아이를 임신한 쥬느비에브(카트리느 드뇌브)를 책임지겠다며 청혼하여 결혼에 골인한다.ㅎㅎ]

 

 

   장면은 공화정 집회장. 거기서 마라는 경찰에 체포됐다던 리돈니를 만나 1년 동안 소식이 없던 부베가 유고슬라비아에 있다는 정보를 얻는다. 이때 거리엔 삐라를 뿌리며 공화제에게 표를, 가리발디에게 한 표를 달라고 호소한다. [註: 이탈리아는 1920년대에 들어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의 파시즘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무솔리니는 나치 독일과 손잡고 추축국(樞軸國)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벌였으나, 1945년 연합국에게 격퇴되었다. 2차 대전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3년 9월23일 파시즘 망명 정부를 세운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다. 이 무렵부터 파르티잔과 피에트로 바돌리오 정부에 쫓기던 무솔리니는 1945년 춘계 이탈리아 공세에서 패한 뒤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4월28일 처형되었다. 이탈리아 민족해방위원회의 결정으로 1946년 6월2일 이탈리아 국가형태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 공화제 54.3%, 군주제 45.7%로 이탈리아 왕국은 해체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콜레로 가는 화물차를 얻어 타고 고향으로 간 마라는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간호한다. 
   마라의 내레이션: 스테파노를 생각하며 그에게 평온함을 느꼈고 의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부베를 생각하면서도 스테파노에게 흔들리는 나… 갑자기 지금을 즐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시 인쇄소로 돌아온 마라. 길거리에는 공화제 승리를 축하하는 퍼레이드가 펼쳐져 모두 일손을 놓고 거기에 합류한다. 스테파노는 마라에 대한 생각으로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무리였다고 말한다. 마라도 당신을 잊으려고 해도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 없었던 둘은 드디어 키스를 하는데….
   어느 날, 리돈니와 아버지가 마라를 찾아온다. 부베가 이반과 함께 1년만에 유고 정부로부터 송환되어 국경에서 체포돼 수감돼 있다는 소식이다. 리돈니와 아버지의 설득에도 면회를 가지 않겠다던 마라는 더 이상의 인연을 끊으려고 불과 15분만 허용된 면담을 하러 가는데…. 
   어색한 만남이다. "리돈니와 아빠가 변호사를 만났는데 재판까지 안 갈 거라고 했다"며 "가더라도 걱정할 필요없다고 말했다"고 안심시키는 마라. 하지만 울먹이며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부베. "그만 해요. 보고 있을 수가 없네요. 남자잖아요. 정신 차리고 낙심하면 안돼요. 당신 혼자가 아니에요. 친구도 변호사도 있어요. 모두 믿고 있어요. 당신을 구해줄 거라고"라며 의연하게 말하는 마라. 
   "내가 운 것은 절망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서야. 또 만날 수 있다니! 헤어져 있는 동안 계속 당신 생각만 했어"라며 "지금도 날 사랑하냐?"고 묻는 부베. "지금도 곁에 있어요!"라고 대답하자 이제 불안이 없어졌다며 다시 와 달라고 요청하는 부베.

 

 

   한편 스테파노는 마라와의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구체적이진 않았단다. 마라가 운다. "무슨 일이 있었다면 숨기지 말고 말해줘. 혼자 고민하지 말고. 힘이 될 수 있을 거야."라는 스테파노의 따뜻한 말에 그를 와락 끌어 안으며 "결혼해요. 지금 당장!"이라고 말하는 마라!
   마라의 내레이션: 부베를 잊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쓸쓸해 보이는 그를 보면 그냥 놔 둘 수가 없었다. 그가 무죄가 되어 나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았으면….
   볼테라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된 부베의 증인으로 재판정에 가는 마라. 리돈니, 아빠 그리고 병석에 있는 부베의 어머니 대신 누나가 참석했다. 또 제지공장에서 만났던 부베의 사촌동생 아르나루도도 참석했다. 
   변호사가 이길 거라고 호언장담을 한다. 한편 죽은 남편과 아들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하기 위해 치에콜라 헌병 부인이 참석해 있다. 
   부베와 이반이 경찰에 끌려 재판정에 나타난다. 수갑을 풀고 피고석에 앉는다. 중간 휴정 때 누나를 만나고 있는 부베에게 리돈니가 "과잉방어라 3년 이하의 형일 거래요"하고 귀뜸해 주지만 기뻐하지 않는 부베. 왜냐하면 "사면 전에 자수했더라면 지금쯤 자유롭게… 멤모랑 친구들은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았어. 도망가면 불리하다는 걸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도."라고 원망하기 때문이다.
   리돈니가 마라에게 말한다. "파르티잔이었던 것을 평가받게 하고 싶지만 이 재판소에서는 문제 해결이 어렵고, 법률로써 억지로 결말을 내려 하고 있어요."라고.
   그런데 증언대에 선 마라가 가슴이 떨려 아무 말도 못하고 퇴석 당한다. 다만 자리로 돌아가다가 부베에게 키스를 하다 제지 당할 뿐, 아버지는 중형이 내리더라도 실망하지 말라고 타이른다.
   한편 그때까지 극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테타노를 만난 마라는 "부베의 재판에 가느라고 약속을 지키기 못했다"며 "만나는 건 이게 마지막이며 이번엔 진심이에요."라고 단호히 말하는데….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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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부베의 연인’ (La Ragazza di Bube)(3)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I)
감옥에 간 애인을 기다리는 시골처녀의 애절한 순정 
 

 

(지난 호에 이어)


   이튿날 이른 아침, 친구 리돈니(쟘피에로 베케렐리)가 부베의 집으로 찾아온다. 그는 마라에게 자기는 헌병의 프락치가 아니라며 치에콜라 준위 살해 사건 때문에 부베에게 지명수배가 내려졌다고 말한다. 
   그는 부베에게 파르티잔의 아지트였던 제지공장으로 피신하라며, 어머님과 누님에게는 경찰이 오면 절대 모른다고 말하라고 당부한다. 
   리돈니는 승용차로 부베와 마라를 폐허가 된 제지공장에 내려주고 다시 오겠다며 떠난다. 
   공장 가까운 곳에 있는 술집에서 당시에 유행하던 재즈곡을 크게 틀어 이곳까지 들린다. 마라는 ‘언제까지나 숨어 지내야 하느냐’고 묻지만 ‘어떻게 될 지 동지를 한 번 믿어보자’고 대답하는 부베. 준위와 그 아들까지 살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하지만 이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마라.
   하지만 “당신이 있어서 의지가 된다”고 말하는 부베. “멤모는 내 편은 아니야. 잘난 척 하면서 설교나 하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당신 아버지는 파시스트한테 쫓기고 오빠 산테는 살해당했어! 파시스트 자식들 꼭 뿌리뽑아 버리고 말겠어. 그 준위는 죽어도 마땅해, 자업자득이야. 그치만 아들을 죽인 건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았기 때문이었어. 제 정신이 아니었어.” 때 늦은 후회다! 

 

 

   마라의 내레이션: 부베의 강해 보이는 태도는 불안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나는 생각했다. 그를 위로하고 지켜주고 싶다고…. 
   아침에 일어난 마라는 부베에게 ‘자기가 좋으면 굿모닝 키스를 해 달라’고 말한다. “버스가 없으니까 날 데리고 온 거냐?”고 묻고 “내가 귀찮으면 솔직하게 말해줘요”라고 매달리는 마라. 그런 게 아니라며 부베는 키스와 애무를 하지만 더 이상을 용납하지 않는 마라.
   밤에 마라에게 담배를 사달라고 부탁하는 부베. 가게에서 담배를 사고 소다수를 사려고 하자 한켠에 파시스트 헌병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냥 밖으로 뛰쳐나오는 마라. 
   공장에 당도하니 부베의 사촌동생인 아르나루도(우고 키티)가 찾아왔다. 그는 부베의 집에서 리돈니가 그만 헌병에게 체포되었다고 말한다. 부베가 총을 보여달라고 조르는 마라에게 총을 건네주자 그녀는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며 냅다 연못에 던져버린다.
 

 

 

 아르나루도는 멀리 외국으로 도망가라고 종용하고, 내일 아침 일찍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난다.    
   떠나기 전날 밤. 부베는 “약혼하기 전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라며 안아달라는 마라의 청을 거절하고,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하니까 안고 싶어 미치겠다”고 말한다. 사랑과 전쟁 사이에서 인간적 고뇌가 엿보인다. 
   “언제까지나 함께 하고 싶어요. 당신을 절대로 혼자 있게 하지는 않겠어요. 당신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요”라며 힘이 다할 때까지 안아달라고 애원하는 마라. 주제곡이 흐르는 가운데 안타깝고 눈물 나는 이별의 순간이다. 그날 밤 마라는 부베에게 처음으로 몸을 허락한다.
 

   또 다시 부베는 기약없이 떠나고 마을에는 해방 1주기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 어린 리도리를 데리고 온 어머니가 “헌병에게 쫓기기나 하는 부베는 제대로 된 남자가 아니니까 잊어버리라”고 마라에게 충고한다. 시샘 많은 친구 릴리아나는 ‘마라는 마음이 아프시다’며 히히덕 거리고… [註: 영화 속 해방 1주기 플래카드 글씨로 미뤄볼 때 이 마을은 이탈리아 중북부 투스카니에 있는 몬테구이디(Monteguidi)인 것 같다.]
   부베의 행방을 찾던 헌병이 마라를 취조한다. 헌병대장은 잡히면 러시아로 보내 종신형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러시아’ ‘종신형’이라는 말에 겁이 난 마라는 아버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지만 ‘당이 상황을 바꿔줄 것’이라며 ‘모두 당에 맡기고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는 대답뿐.

 

 

   마라는 남의 동정을 피하고 싶어서 고향을 떠나 스티레리아(Stireria)에 있는 친구 이네스(모니크 비타)의 도움으로 다림질 하는 가게에 취직하고, 그녀의 여동생 집에서 같이 살게 된다. 이네스는 “결혼할 때까지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게 좋은 거야. 찰싹 달라붙어 있으면 피곤해져. 멀리 떨어져 있으면 마음 편하지. 나는 즐기면서 지내. 일도 힘든데. 내가 너라면 맘놓고 지금을 즐길 거야. 지조를 지킨다고 해도 그가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잖아”라고 말하는데….
   거리 좌판에서 따끈따끈한 군것질거리를 사서 둘이 나눠먹는다. 벽에는 영화 ‘애수(Il Ponte di Waterloo)’의 포스터가 붙어있다. [註: 이탈리아 해방일(Liberation Day)은 1945년 4월25일이다. 1주기이면 배경은 1946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1940년 영화인 ‘애수(Waterloo Bridge)’가 이탈리아에서 개봉된 것은 1946년 4월 이후였다고 추정 가능하다. 아무튼 이는 비극적 스토리를 주인공 마라와 대비시키는 장치이다.]
   이네스가 비극적인 영화 내용을 설명하자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는 마라. 극장 앞에 도착하니 이네스의 애인인 마리오와 그의 친구 스테파노(마크 미셸)가 기다리고 있다. 이네스가 춤추러 가기 위해 네 사람을 만들었으나 마라는 오히려 영화를 보고 싶어해 스테파노와 함께 영화관에 간다. 만원이라 입석으로 보는데 스테파노가 선수를 쳐서 한 자리를 잡아 마라를 앉힌다.
   영화가 끝나니 저녁 7시. 식사를 거절하고 집으로 가겠다는 마라를 바래다주는 스테파노. 그는 옛 약혼자의 사진을 보여주며 바람을 피고 행실이 나빠 헤어졌다고 말한다. “약혼하면 여자가 남자의 체면을 세워줘야 한다”며 “그러나 지금도 가끔 서신은 교환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음 날 이네스가 외출하고 혼자 있던 마라는 옆 방 남자의 추근거림을 피해 홀로 거리를 걷다가 스테파노를 만난다. 그는 자기가 운영하는 인쇄소로 데려가 구경을 시켜준다. 라이노 타이프(자동식자주조기)까지 구비한 훌륭한 인쇄소이다. 마라의 이름과 성을 묻고 즉시 ‘마라 카스테루치’를 식자하여 주조해주는 스테파노.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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