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돈댁은 비한인(홍콩 출신)이기에 특히 우리 부부와는 말이 아주 잘 통한다고 할 수가 없다. 사돈댁은 두 분이 모두 인텔리들이라 어느정도 영어를 하긴 하지만 우리와 속내까지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와 영어로 대화할 때는 대충 몸짓 눈짓으로 의사를 주고 받는 식이다.
외식(外食)에 익숙한 사돈댁은 우리를 종종 중국식당에 초대하는데, 식당에선 주로 사돈어른이 주문을 하고 우리는 그냥 지켜보고 있으면 알아서 맛있는 음식을 시켜주신다. 우리 입맛을 어떻게 그리 잘 아시는지, 대개 메뉴에 만족한 편이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속이 편한지 모르겠다.
외국 출신 사돈댁을 보면서 우리는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즉, 인간관계에서 적당한 거리가 유지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지 새삼 감사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분들은 같은 동양인이라 정서는 비슷하기에 큰 이질감 같은 것도 없다. 함께 있으면 그저 마음이 편안하다. 섬세한 감정까지는 모르겠으되 적당히 모른체 하니 오히려 좋다.
한국사람들끼리는 얼굴 표정만 봐도 속마음을 훤히 알지만 이분들은 그렇지가 않다. 물론 출신국 이전에 사람 나름이겠지만 이분들은 무슨 일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는 분들이 아니다. 표정을 보아 대충 웃으면 그냥 좋다는 뜻이다. 딸과 사위가 오래 사귄 끝에 결혼을 했지만 사돈댁과는 그동안 단 한번도 언짢은 일이 없었다. 결혼식 후에도 시부모의 ‘텃세’ 같은 것이 전혀 없어 딸아이는 무척 편하게 살고 있다.
사돈이 같은 한국사람들이었더라도 그랬을까. 아마 결혼식 절차와 신혼집을 정하는 문제 등에서 사돈끼리 다소간 실랑이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최근 한국에 나가 듣자 하니, 누구네는 결혼을 앞두고 혼수(婚需)와 신혼집 문제로 사돈댁 간에 티격대다 결혼식 직전에 혼사 자체가 깨져버렸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참 행복하다 하겠다.
인간관계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을 때 원만히, 오래 유지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친밀한 사이라도 해외여행, 특히 옵션 투어는 가능한 함께 가지 말라고 권한다.
평소에는 잘 모르던 서로의 습성이 여러날을 함께 지내면서 속속들이 나타나 실망하는가 하면, 여행 취향도 서로 달라 사소한 일로 언쟁을 벌이다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내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번에 우리 가족이 한국에 나갔을 때 형제자매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가 이민 오지 않고 계속해서 한국에 살았더라도 이렇게 서로가 반가워하고 애틋해 했을까. 아마 가까이 살았더라면 가끔은 토닥대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어쩌다 한번씩 보니 반갑고 살가운 것이 아닐까.
촌수(寸數)가 없다는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살뜰하게 사랑하는 사이라도 서로를 너무 가까이 훤히 알다보면 상대방의 허물이 눈에 띄고 그러다보면 가끔은 티격대는 일도 생기는 법이다. 남편이 어디 출장이라도 갔다 돌아오면 아내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도 가끔은 서로 떨어져 쉬는 시간이 필요함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0…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우화 가운데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 Dilemma)' 라는 것이 있다. 그 내용은 대충 이렇다. 고슴도치들은 날이 추워지면 추위를 막기 위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가시에 찔려 깜짝 놀라며 황급히 멀리 떨어진다. 그러나 곧 추위를 느끼고 다시 가까이 다가가지만 이내 서로의 가시에 찔려 아픔을 피하려 다시금 멀어진다.
그들은 추위와 아픔 사이를 반복하다 마침내 서로 적절한 거리를 찾게 된다. 즉,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절묘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가장 편안하면서도 따뜻한, 상처입지 않을만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행복해한다.
이 이야기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동물의 세계가 그러하거늘 만물의 영장인 인간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사이가 좋다’는 말이 있다. 가정이나 사회생활 등에서 ‘관계가 좋다’는 뜻이다. 그러면 ‘사이가 좋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사이’라는 것은 한자로 ‘간(間)’이다. 그러니까 사이가 좋다는 것은, 서로가 빈 틈 없이 딱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사이’에 있다. 서로 간에 적절한 거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관계가 오래, 아름답게 지속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많이 쓰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즉 ‘너무 가까이도 하지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마라’는 말을 철칙으로 삼을 때, 비로소 좋은 인간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자연의 풍경도 그렇고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멀리서 바라볼 때 아름다웠던 것이, 너무 가까이 가서 보니 실망감을 안겨 주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많던가? 장엄한 산(山)의 위대함은 거리를 두고 보아야 제대로 보이는 법이다.(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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