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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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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터너(page-turner)

-겸손한 세계적 피아니스트 서이삭 씨
 

 “이 후배님, 좀 도와주세요. 사정이 급합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꽤 다급해 보였다. “무슨 일이신데요?” 나는 긴장해서 물었다. “내일 저녁이 공연인데, 피아노 연주자를 도와줄 ‘페이지 터너’를 급히 구해야겠습니다…”


 지난 12일 저녁 토론토 아트센터에서 열린 라메르에릴(La Mer et L'Ile 바다와 섬)의 토론토 공연을 앞두고 이함준 이사장이 걸어온 전화였다. 사정인 즉, 공연시 피아노 연주자를 위해 악보를 넘겨줄 사람을 구해달라고 지인을 통해 연락했더니 한 학생을 소개했는데, 막상 리허설을 해보니 도저히 연주자를 도와줄 만한 실력이나 경험이 부족해 안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주변에 피아노를 잘 하는 사람 좀 없느냐고 애타게 찾는 것이었다.


 외교관 출신인 이 이사장은 나의 대학 선배라 이미 교신을 통해 알고 있던 터였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이번 피아노 5중주는 무척 난해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40여분) 곡이라 피아노 실력이 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통화를 하면서 순간적으로 그를 떠올렸다. 그라면 어떤 곡도 소화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가 남의 연주회에서 악보나 넘겨주는 일을 수락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우선 시도는 해보자는 생각에 일단 이사장과 통화를 마쳤다.


 그러고나서 밤 늦은 시간이지만 사정이 급한만큼 즉각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후사정을 설명한 후 반신반의 하며 “혹시 그런 일 좀 맡아 줄 수 있겠어요?” 했더니 그는 의외로 선선히 대답했다. “아, 그럼요. 사정이 그러신데 제가 도움이 된다면 해야죠.”… 일이 이렇게 순탄하게 풀리다니!                             


 페이지터너(page-turner)는 음악회에서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할 때 흐름이 끊어지는 것을 막고 연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대신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악보를 넘겨주기만 하는게 아니라, 곡(曲) 자체를 잘 이해하고 읽으면서 연주자와 호흡을 맞춰야 하므로 중요한 음악회일수록 초보자나 비전문인은 할 수가 없는 일이다.


 페이지 터너의 역할이 이처럼 중요하긴 하지만 주연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조연이다. 그래서 그같은 음악의 대가(大家)에게 그런 조연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실례는 아닌지 무척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흔쾌히 보조역할을 수락했다. 그가 바로 세계적 피아니스트 서이삭 씨이다.  


 서이삭(Isaac, Yisak Seo.35)이 누구인가. 토론토한인사회에도 잘 알려져 있는 그는 눈부신 프로필과 수상경력만 보아도 금방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로열컨서버토리 출신인 그는 몬트리올 맥길대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프랑스 파리와 벨기에, 이탈리아 등에서 활동했다. 특히 음악의 메카 줄리어드 음대에서 학부 및 석사 과정을 마쳤다. 각종 국제 콩쿠르에서 화려한 수상 경력을 지닌 그는 연간 국제연주 일정이 빡빡하다. 다시 말해 남의 연주에서 악보나 넘겨줄 기수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기꺼이 그 역할을 수락했다.


 공연 당일, 우리 가족은 2부 순서에서 바르토크의 피아노 5중주가 연주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다른 연주자들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분들께는 미안하지만 모든 시선이 오로지 서이삭 씨에게만 집중됐다. 1시간 일찍 와서 악보를 훑어보긴 했다지만 과연 실수없이 잘해내야 할텐데… 마치 우리가 페이지를 넘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매우 침착하고 진지한 자세로 의자에서 앉았다 일어서기를 수십차례 반복하며 악보를 빈틈없이 넘겼다. 나는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곡을 완전히 숙지하지 못하면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40여분에 걸친 긴 연주가 끝나고 객석의 박수소리가 터져나오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특히 서이삭 씨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가 주인공인 것처럼. 그런데 아쉽게도 모든 출연자들이 나와 인사를 하는데 서씨는 조용히 무대 뒷편으로 사라져갔다. 그럴 때 누가 좀 함께 그의 손을 잡고 인사를 하게 하면 좋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출연자 중에서 비록 조연이긴 하지만 유일한 토론토 한인이 아닌가.        


 나는 이날 서이삭씨를 다시 보았다.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직접 곡을 연주하는 것과 남을 위해 악보를 넘겨주는 것은 다른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뒷일을 기꺼이 맡았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수년 전 그의 부모와 함께 한 성인장애인공동체 행사장에서였다. 그의 어머니 역시 피아니스트인데 다리가 불편해 목발에 의지하고 있다. 나는 그때 서씨가 뛰어난 음악인임에도 매우 겸손하고 상냥해 금방 친해졌고, 그후 종종 그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최근에는 토론토의 어느 의사 댁으로 음악 애호가들을 초청해 피아노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기품이 묻어나는 고풍스런 저택에서 진지한 모습으로 연주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한 감동과 인간미를 느꼈다.     


 서이삭씨의 인생 모토(motto)는 ‘My life is a Music’이다. 즉, 음악 자체가 그의 인생이다. 이같은 음악 거장을 알고 지낸다는 사실이 나는 그저 행복할 뿐이다.


0…한편, 이번 라메르에릴의 토론토 공연은 아쉬운 점도 많았다. 우선 외형적인 면에서, 홍보가 절대 부족했고 토론토총영사관의 비협조, 티켓 발매 및 배분, 한국의 자연과 문화 역사를 알린다는 주최측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독도에 대한 음악은 단 한곡에 불과했고, 독도에 관한 영상이나 배너 등도 전무해서 단순한 음악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또한 티켓에 좌석번호를 써놓고선 막판에 아무 자리에나 앉도록(general admission) 바꾸어 혼선을 빚고 공연의 품격도 떨어트리고 말았다. 특히 한국의 문화를 알린다면서 정작 외국인의 모습은 안보여 한인들만의 잔치가 되고 말았다. 세련되지 못한 이런 처사들은 앞으로 개선이 돼야 할 것이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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