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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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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청라언덕- 봄이 오면 더욱 그리운 동무들

 

-세월은 가고 아련한 추억만 남아

 


▲근대기 대구지역 의료선교사들이 살았던 청라언덕의 주택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백합같은 내 동무여/내가 네게서 피어날 적에/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 생각)

 

 매년 이맘때면 절로 흥얼거려지는 가곡. 궂은 봄비가 내리는 주말, 혼자서 색소폰으로 이 노래를 불려니 처량한 생각에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청운(靑雲)의 꿈에 부풀던 고교시절, 마냥 푸르고 싱그럽던 시절, 꿈도 많고 이상도 높았다. 그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누구는 입시지옥으로 불리던 그 시절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푸르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현실이 힘들고 고달플 때 이 노래를 부르면 다시 생기가 살아난다.      

  

0…박태준(1901∼86) 작곡, 노산(蘆山) 이은상(1903~82) 작사. 이 노래는 홍난파의 ‘봉선화’와 함께 한국 최초의 가곡으로 불린다. 그런데 노래의 탄생 배경이 사뭇 낭만적이다.

 

 가사에 나오는 청라언덕은 푸른(靑·청) 담쟁이덩굴(蘿·라)이 우거진 언덕이란 뜻이다. 이곳은 대구시 동산동 계명대 동산병원 뒤에 있는 언덕으로 1900년대 초 미국 선교사들이 살던 곳이다.

 

 고교시절 박태준 선생은 담쟁이가 우거진 이곳을 지나다녔으며, 언덕 아래 있는 여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등하굣길에서 만나며 짝사랑하였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말 한마디 못하고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그녀를 못잊어 했다.

 

 이후 경남의 한 고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동료인 이은상 선생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이은상은 이를 노랫말로 썼고 박태준에게 곡을 짓도록 했다. 가사 속의 ‘백합 같은 내 동무’는 박태준이 짝사랑했던 여고생이다.

 

0…대구 동산의료원과 중구 문화원은 2009년 청라언덕에 ‘동무생각’ 노래비를 세웠고 3년 뒤에는 창작오페라 ‘청라언덕’이 제작돼 국제오페라축제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지금도 봄이 되면 백합 화단에 꽃이 만개(滿開)하고 이 가곡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다른 논리를 펴기도 한다. 노래에 나오는 ‘청라언덕’은 대구가 아니라 마산에 있다는 것. 노래의 작시(作詩)는 노산의 작품인데 그는 마산 사람이다. 그가 살던 마산의 고향마을 뒷산이 노비산으로, 봄이면 쑥이 지천으로 덮인다.

 

 파란 쑥이 피어있는 그 뒷산과 언덕을 노산은 청라언덕이라 했고 그 언덕을 그리워하며 노랫말을 썼다는 것이다. 특히 동무생각의 다음 2절을 보면 그런 주장이 더욱 그럴듯해 보인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들오는/저녁 조수 위에 흰새 뛸 적에/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흰새 같은 내 동무야/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가사 중 백사장이니 조수(潮水)니 하는 말은 바다와 관련된 것인데 대구에는 바다가 없다. 따라서 이 노래는 마산을 생각하고 만든 것이라는 논리다.

 

0…하지만 이런 논쟁은 부질없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이 노래는 국민 애창곡이 된지 오래다. 청라언덕이 대구에 있으면 어떻고 마산에 있으면 어떤가. 누구든 불러 마음이 평온해지면 그것으로 족하다.

 

 한편, 노래의 작사자 노산은 ‘가고파’ ‘옛동산에 올라’ ‘그리워’ ‘그집 앞’ 등 수 많은 작품이 가곡으로 만들어지는 등 한국 시조문학의 현대화에 이바지한 공이 지대하다.

 

 그런 한편으로 그의 친일.친독재 논란 또한 후세인의 입길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노산의 고향인 마산의 시민사회단체에 따르면, 그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친일 의혹이 잇달아 제기되고, 일제 강점기 만주국의 대변지 ‘만선일보’에 재직하는가 하면, 친일잡지 ‘조광’의 주간(主幹)이라 밝힌 자료도 있다.

 

0…노산은 특히 자유당 정권 당시 사사오입 개헌 직후에 있었던 이승만의 80회 생일에 그를 찬양하는 송가를 헌시하고, 3?15 부정선거 때는 문인유세단을 조직해 이승만을 지지했다.

 

 자신의 고향 마산에서 3?15 의거가 일어나자 ‘무모한 흥분’,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라고 모독하더니, 4?19혁명 직후에는 4.19를 찬양하는 비문을 쓰기도 했다.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공화당을 창당할 때는 창당선언문을 작성하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일반적 여론”이라는 글을 바치고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이런 오락가락 전력(前歷) 때문에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빛을 잃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뛰어난 시조나 시작품은 두고두고 세인들 가슴을 적시기에 손색이 없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라는 구절은 요즘 나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0…전력 시비에 싸여 빛을 잃은 문인과 예술인이 어디 노산 뿐인가.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홍난파, 김기창, 안익태, 노천명, 모윤숙… 셀 수도 없이 많다.

 

 문인과 예술인들은 대가 약해서 그런지 무력과 권력 앞에 쉽게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긴 하지만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남는게 없는 것이 대한민국 역사의 서글픈 현실이다.

 

 모두가 저항 예술인이 될 수도 없는 노릇, 작품과 작가의 생을 분리해서 볼 수는 없을까.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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