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5)-자카리 테일러(4)

 


임기 중 사망한 테일러 대통령 (1849-1850)

 

 대통령 재임(1849-1850)

직업군인으로 평생을 보낸 테일러는 1849년 3월 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행정적 조치보다는 타협으로 미국 정부가 가진 문제 해결을 찾고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따라 국제관계에서 중립을 지키는 정책을 강조했다.

 

  테일러는 민주당 정치인들을 배제하고 각 지역에서 골고루 선출된 정치인들로 내각을 편성했다. 유능한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헨리 클레이 대신 잔 클레이튼을 국무장관으로 선임하여 위그당의 정책과 민주당의 정책을 절충하는 타협장책을 세웠다. 테일러는 1849년 여름 미 북동지역을 순방하는 중 설사 복통으로 9월 일찍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노예제도 찬반으로 인한 남북 간의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테일러는 1850년 1월 타협정책을 세워 켈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지역을 연방 주로 승격시켜 노예제도 선택을 연방법보다 주법으로 해결하게 하였다. 테일러가 개인적으로 300여명의 노예를 소유하여 자기들과  같은 편으로 판단하고 테일러를 지지했던 남부 정치인들은 서부개척주가 노예제도를 금지할 경우 많은 노예들이 주인을 버리고 서부개척주로 도망하여 자유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에 연방주로부터 분리운동을 재강조하게 되었다.   

 

 1850년 4월 19일 테일러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사업은 양국의 동의하에 이루어지고 양국은 중남미에 군 병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클레이튼-불워트 조약을 맺어 영국이 중남미에 눈독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사망(1850)

 1850년 7월 4일 미독립기념일 위싱턴 기념탑 모금 운동 중 얼음 탄 우유에 과일을 먹은 테일러는 며칠 후 심한 구토와 설사를 동반하는 콜레라에 걸려 7월 9일 65세의 나이로 백악관에서 세상을 달리했다. 취임한 지 16개월만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 최선을 다했지만 전투경험 없이 전투에 나간 것에 비유하며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7월 23일 장례식을 마치고 켄터키주 루이빌에 자리 잡은 스프링 필드 테일러 농장묘지에 안장되었다.

 평생 남편을 따라 전쟁터를 고향으로 지낸 영부인 마가렛 테일러는 1852년 8월 14일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사랑하는 남편 곁으로 갔다.

 

대통령의 목숨을 앗아간 콜레라(1841-1850)

 1832년부터 1866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콜레라 역병으로 미국인구 2300만명중 20만명이 사망했다. 대통령들도 예외는 없었다. 윌리엄 해리슨은 1841년 취임 한 달 만에, 제임스 넉스 포크는 1849년 임기를 마친 후 3달 만에 자카리 테일러는 1849년 취임 후 16개월 만에 콜레라로 희생되었다. 

 

  하수도가 설치되지 않아 위생시설이 열약하고 버려진 오물이 음료수에 스며들어 정착인들에게는 설사병이 예사였다. 

백악관 실내 목욕탕은1853년이 지나서야  설치되었고 서민들은 1년에 서너 번 목욕했다. 냄새가 지독한 비누는 빨래용으로만 사용되었고 보통 얇은 흰색의 속옷을 갈아입어 몸의 때를 닦아냈다. 더운물이 귀해 목욕통에 더운물을 넣고 조부모부터 시작해서 나이 순서대로 목욕하면 어린 아기가 마지막 차례가 된다. 같은 목욕물을 나이에 의해 면역성이 약한 노인부터 시작하여  목욕하는 습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세부터 내려온 독일 속담을 이전한 독일계 이민자들은 미 정착지에서 더러워진 목욕물을 버릴 때 먼저 아기를 목욕물에서  꺼내라고 표현한다.  영어로 “ DON”T THROW THE BABY OUT WITH BATHWATER.”  이 속담은 생활영어가 되어 불필요한 물건을 버릴 때 귀중품을 먼저 고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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