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캐나다 침략(3)-미 독립전쟁 전후(3)

 

영불에 의한 캐나다 역사(1756-1775)

 1608년 이후 프랑스 개척자들이 캐나다로부터 모피를 유럽으로 수입하는 모피산업이 활성화되자 영국도 모피 교역을 위해1670년 5월 2일 HUDSON”S BAY사를 설립하고 허드슨만 남쪽 연안에서 원주민들이 만든 모피와 유럽인들의 총기류 및 생활용품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이는 영불간에 무역경쟁을 일으키게 되었고 곧 영불간에 캐나다 식민지화 전쟁으로 이어졌다.

1755년 오하이오 계곡에서 프랑스에 패배를 당한 영국은1759년 9월13일 퀘벡시 근교 에브러햄 평야 전투에서 프랑스를 제압하고 퀘벡을 점령하였다. 7년전쟁 후 영국은 퀘벡은 물론 온타리오 서부까지 이르는 캐나다 전역을 영 식민지로 만들었다.

프랑스계 정착인의 숫자가 영국계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영국은 1774년 6월 퀘벡자치법을 인정하고 1755년 5월 시행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프랑스계 정착인들은 그들의 언어 및 풍습을 지키며 영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미 독립군에 의한 캐나다 침략(1755-1776)

1775년 4월19일 메사츄세츠주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민병대는 영국에 반기를 들고 미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13주의 민병대는 미 연합군이 되어 미 연합상원에 귀속되었고 민병대 수장들은 13주 각 지역의 영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베네딕트 아놀드 대령은 동년 5월에 몬트리얼 남쪽 티콘드리아 영국군요새를 점령하여 독립군의 쾌거를 올렸다. 6월에 조지 워싱턴은 미 연합상원의 만장일치로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미 연합상원은 영국의 식민지가 된 캐나다 퀘벡주를 미 연합 14번째 주로 만들어 영국군을 북미에서 축출하는 전략을 세웠다. 1755년 영국이 캐나다 대서양연안에 정착하는 프랑스계 아카디언을 몰아냈고 영불간에 치뤄진 7년 전쟁이 프랑스의 패배로 이어져 프랑스 정착인들이 세운 퀘벡 캐나다를 영국에게 빼앗긴 울분을 이용하자는 전략이었다. 프랑스계 국내인들은 현재까지도 이 울분을 간직하고 있다

9월 미 연합상원은 퀘벡 침공을 위해 군사 3000명을 일으키고 필립 스카일러 준장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스카일러 휘하의 이쓴 알렌은 100명 정도의 군사로 몬트리얼시를 함락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공격했다가 완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스카일러는 병이 걸려 리처드 맛가메리 준장이 작전임무를 인수받았다.  

맛가메리는 샴플레인 호수를 경유하여 몬트리얼시를 향해 11월 8일 몬트리얼 근교 포인트 센 챨스에 프랑스 정착자들의 자유해방군 우대를 받으며 진입했다. 몬트리얼시를 방어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기 칼튼 퀘벡주 지사 겸 군통치관은 평민에 섞여 퀘벡시로 도주하였고 11월 13일 맛가메리는 몬트리얼시를 손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는 데이빗 우스터 준장에게 몬트리얼 통치를 맡기고 퀘벡시를 공격하기 위해 행군을 계속했다.

한편 캐나다 퀘벡 원정에 군지휘관으로 선발되지 않은 아놀드는 9월 케임브리지로 돌아와서 워싱턴 총사령관에게 퀘벡시 동쪽을 협공하는 원정을 자원했다. 워싱턴은 쾌히 승낙하고 군사 1000여명과 군수품을 제공했다.

메인주를 거처 케네스강을 따라 배를 타고 약속대로 11월 중순까지 퀘벡주까지 가는 원정길은 늪과 악천후의 연속으로 배가 샐 때는 보급음식 및 화약까지 물이 침투되어 험난한 장애를 넘어야 했다.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한 250여 명의 민병들이 고향으로 돌아갔고 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하여 세인트 로렌스강에 도착했을 때는 600여명의 군사만 남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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