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2대 부통령(1797-1801)
1796년 대통령선거후보로 출마한 제퍼슨은 68의 선거인단투표수로 71을 받은 애덤스에게 패하고 부통령이 되었다. 해밀턴의 영향을 받는 워싱턴 전대통령의 각료들을 경질하지 않고 내각을 형성한 애덤스의 정책을 제퍼슨은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못하고 민주공화당 상원들과 함께 애덤스의 정책을 논쟁으로 끌고 나갔다. 아니면 프랑스 미 주재원을 이용하여 애덤스의 정책을 방해하고 프랑스로 하여금 영국과 전쟁을 유도하려 했으나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다.
애덤스의 국가반역보안법을 반대하기 위해 제퍼슨은 메디슨과 함께 주정부는 주민의 권리나 자유를 위한다면 연방정책을 받아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켄터키 버지니아해결책자를 익명으로 발간하여 켄터키와 버지니아주로 하여금 분리정신을 일으켜 후에 남북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제퍼슨은 개인적으로 워싱턴을 존경한다고 했지만 워싱턴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미3대 대통령(1801-1809)
1800년 대통령선거에서 제퍼슨은 버와같이 73의 선거인단표를 얻어 동점이 되었다. 해밀턴의 영향을 받은 미연방하원은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버를 부통령으로 투표했다.
1801년 3월 4일 호화스러운 마차행렬대신 제퍼슨은 혼자 평복차림으로 말을 타고 취임식장에 도착한 후 말의 재갈을 손수 마구간에 걸었다.
첫 번 취임식에서 그는 “우리 모든 미 국민은 표현의 자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소유하고 있는 연방당원이고 민주공화당원이다”라고 강조하여 미 국민의 단결을 호소했다. 그는 해밀턴의 영향을 받은 예산을 취소하고 위스키 과세를 폐지하고 여러가지 세금을 줄이거나 폐지했다.
1780년대까지 미국 상선은 지중해 해적들로부터 영국의 보호를 받았다. 미합중국 독립 후 바바리해적단들에게 텃세를 내며 미국 상선을 보호받아야 했다. 1802년 제퍼슨은 애덤스가 창설한 막강한 해군력으로 대서양을 건너 바바리 해적단을 토벌하고 지중해뿐만 아니라 유럽에 미국의 막강한 해군력을 과시했다.
그 후 해군을 비롯한 국방비와 인프라비용을 줄여 연방정부의 지출을 삭감시켰다. 반면에 1802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세워 후세에 미국의 국방력을 키우는 인재양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긴축정책으로 임기8년간 8천3백만 달러의 연방적자를 5천7백만 달러로 줄일 수 있었다. 세금을 삭감하고 국가경비를 줄이는 정책은 17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공화당이 고수하고 있다.
또한 애덤스가 제정한 국가보안 반역법을 개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폐지했다. 그러나 극구 반대했던 해밀턴의 중앙은행제도는 국가도산을 피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유지해야 했다.
제퍼슨은 1803년 7월3일 프랑스 나폴레온으로부터 루이지애나 지역을 매입했다. 이로 인해 국토를 두 배로 늘린 공적을 인정받아 제퍼슨은 1804년 대통령 재임선거에서 선거인단 162의 표를 얻어 4표를 얻은 경쟁자 핑크니를 압도하고 재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첫 번째 임기 중 제퍼슨 정책을 반대하는 버 부통령은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1804년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해밀턴과 권총격투에서 해밀턴을 총격 살해한 후 살인죄로 몰려 도주하던 버는 위킬슨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멕시코 땅을 도모하려다 체포되어 해밀턴 살인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결국 버는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사건 해결을 위해 제퍼슨은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
1807년 제퍼슨은 플로리다 서부지역을 2백만 달러에 매입하려다 실패했다. 또한 동년 영국과 외교관계가 악화되어 영국과 통상금지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경제가 침체되어 국민으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었고 결국 이 정책은 1812년 영미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농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일으키려는 제퍼슨의 농경정책은 중앙은행과 제조업 융성 없이 국가경제가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 후세에게 알려지며 세계100대 부호들이 미국에서 꿈틀거리게 되었다.
은퇴(1809 -1926)
1809년 제퍼슨은 3선을 포기하고 고향 버지니아주 먼티첼로로 돌아갔다. 그는 교회에 소속되지 않는 대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버지니아주대학 설립 계획을 세우고 1819년 직접 건축설계를 마친 후 건축비조달을 위해 1820년 버지니아주의회 보증으로 세 차례에 걸쳐 18만 달러를 융자받아 1822년 건축을 완공하고 5만 달러 가치의 대학도서관을 세운 뒤 1825년 버지니아대학의 첫 개강을 가능하게 했다.
한편 1800년 이후 정적인 애덤스와 교류가 없었던 제퍼슨은 1812년 애덤스의 부인 애비게일의 중재로 친분을 맺기 시작하여 14년간 가장 친한 펜팔친구가 되었다. 재직 중 정적이라도 은퇴를 한 전직대통령들은 친화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남겼고, 20세기말 전직대통령들은 단결의 상징인 프레지던트 클럽을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의 민주주의 선거를 파괴하려고 노력하는 트럼프는 자신은 원치도 않겠지만 프레지던트 클럽 멤버들이 트럼프가 원해도 그를 클럽에 포함시킬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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