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7호에 이어)
뽑은 칼은 그대로 칼집에 꽂지 않는다(알렉산더 해밀턴)
해밀턴의 연방당
해밀턴 재무장관과 제퍼슨 국무장관은 직책을 맡은 지 1년이 지난 1790년부터 의견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해밀턴(35세)은 외향적이며 직설적이고 회의분위기를 통제하려는 반면에 제퍼슨(47세)은 붙임성 있고 학자타입에 조용하고 자제하는 스타일이었다.
근본적으로 제퍼슨은 중앙연방제도보다 주자치운영체제를 주장했고, 사설 중앙은행제도를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제조업보다 농업양성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해밀턴은 존 애담스 부통령과 잔 제이 대법관을 포함한 연방당(Federalist Party, 1791-1812)을 만들었고, 제퍼슨은 제임스 매디슨과 제입스 먼로를 중심으로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 1792-1825 )을 만들었다.
독립전쟁 이후 해밀턴은 실리중심으로 영국과 무역조약을 맺고 친 영국정책을 추구한 반면에 제퍼슨은 미독립전쟁을 도와준 프랑스와 연합정책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둘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무소속인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부서 장관들이 창당을 하고 사사건건 분쟁으로 이어질 때마다 어느 편을 들어주지 않고 상원으로 하여금 해밀턴의 정책을 선택하게 통치를 해나갔다.
1794년 제퍼슨은 국무장관을 사임했고 그 이듬해 해밀턴은 재무장관직을 떠나 변호사업을 계속했다. 장관직을 사임했지만 해밀턴은 워싱턴 대통령 재임 중 계속 어드바이저로 일했고, 1796년 워싱턴 고별사를 편집했다. (유동환의 돈 이야기 62호 참조)
지속적인 정치권 참여
1796년 미합중국2대 대통령선거에 해밀턴은 연방당 소속 토마스 핑크니를 대통령에 잔 애덤스를 부통령에 당선되도록 비밀리에 선거운동을 했으나 결과는 애담스가 제2대 미합중국대통령으로 민주공화당의 제퍼슨이 제2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암약적인 선거운동이 널리 알려져 해밀턴은 애덤스와 숙적이 되었다. 애덤스 대통령은 취임 후 계속 친영국정책을 고수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와 해상에서 무역선들의 충돌을 야기하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가 침공할 것이라는 전제로 미 해군을 양성시켰다.
그는 1798년부터 가상전쟁태세를 갖추고 은거생활을 하는 워싱턴에게 총사령관 자리를 부탁했다. 워싱턴은 해밀턴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조건으로 애덤스의 부탁을 수락했다. 애덤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워싱턴 요청에 의해 해밀턴을 2성 장군 부사령관으로 승진시켰다.
이로 인해 국방장관직을 지낸 헨리 낙스 고참 2성 장군이 사임하게 되었다. 1799년 워싱턴 사망 후 해밀턴이 총사령관이 되었으나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은 1800년 가상으로 끝나게 되었다.
1800년 미 대통령선거에도 해밀턴은 자기중심의 후보자를 위해 선거유세를 감행하였다. 그는 핑크니와 제퍼슨을 밀어주었지만 제퍼슨과 애런 버가 같은 표를 얻어 재투표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밀턴의 정치영향력으로 제퍼슨이 제3대 대통령, 버가 3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마지막 결투
버는 4년 후 미 부통령 입후보를 포기하고 뉴욕주지사로 입후보했으나 해밀턴의 연방당 유세로 낙선되고 말았다. 어느 정찬회에서 해밀턴이 버에 대한 모독적인 표현을 하며 민주공화당이 버를 후보로 추천한 것은 잘못된 처사라고 말한 것이 앨바니 신문에 나온 것을 보게 된 버는 오랜 관계를 맺었던 해밀턴에게 명예훼손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해밀턴은 거절했다.
계속적인 사과요구에 해밀턴이 불응하자 버는 총에 의한 결투를 신청했다. 자신의 명예는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느낀 해밀턴은 1804년 7월 11일 이른 아침 해뜰무렵 뉴저지주 위허큰에서 버와 결투로 바른쪽 하복부에 총상을 입고 다음날 수술 중에 목숨을 잃었다.
반대방향으로 10발작을 걸은 다음 총을 치켜들고 신호에 의해 돌아서면서 총격을 가하는 결투에서 버는 해밀턴 살인죄로 남부로 피신해야 했다. 공교롭게 3년 전 해밀턴의 큰아들 필립도 같은 지역에서 권총결투로 목숨을 잃었다.
모리스 뉴욕주지사는 해밀턴 장례식 추도사를 읽고 미망인 가족을 위한 연금을 만들었다. 해밀턴은 맨하탄 트리니티에 안장되었고, 그를 추모하는 정치인들은 30일간 검은 리본을 달았다.
1780년 동갑내기로 결혼한 그의 미망인, 부호의 딸 엘리자베스 스카일러는 결혼 초부터 거의 혼자 8명의 자녀를 키웠고 그가 사망한 후 해밀턴의 모든 서류와 책을 정돈 보존했다. 장남과 남편을 잃은 미망인은 그가 사망한지 50년 후 1854년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해밀턴 뮤지컬은 이 장면을 가장 비통하게 묘사하며 막을 내린다.
사라지지 않는 해밀턴의 정경정책
해밀턴의 미래지향적인 정경정책 특히 사설 연방은행제도를 채택한 워싱턴은 미국을 세계 자본시장의 지속적인 종주국으로 만드는 초석을 만들었다. 오늘날 해밀턴의 업적을 상기시키는 것은 세계를 이끌어가는 미국 자본주의를 분열로 약화시킨 트럼프의 실책을 바로잡을 수 있는 동기부여라 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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