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깜짝 놀라 연유를 물어보니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이 통했던 듯 우리가 떠난 후 곧 석방되었단다. 빨리 걸으면 중간에서 만날 것이라고 했지만, 몸이 말을 안 들어 지금 왔다며 연신 정말 고맙네, 고마워라고 하신다.
며칠 쉬었다 가겠다는 장 씨와 헤어진 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나중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는 무사히 벌교에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 벌교는 빈번히 미군기의 폭격을 받았는데 그의 가족이 폭격 때문에 한자리에서 몰살했다는 소식을 듣곤 한동안 멍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장영자 양은 국민학교 6학년 때 나와 같은 반이었다. 졸업한 지 불과 3년 정도여서 그 여학생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라 괴로웠다.
점심을 잘 먹고 확실한 증명을 하니 마음도 가볍고 기운이 났다. 국도를 따라가도 별로 장애가 없었다. 남행에 절로 속도가 붙었다. 강경을 떠나자 바로 전라도 이정표가 눈에 뜨인다. 어! 고향 친구들 그동안 고생했네. 이젠 마음을 놓고 내 품 안에 오게 하는 말도 없건만 어쩐지 마음이 흐뭇하고 안심이 되며 누가 해칠 것 같지도 않았다. 고생한 보람을 느낀 것이다.
함열, 간촌을 지나니 여기가 수엄니(이리, 지금의 익산)라고 한다. 어떤 촌사람은 수엄니만 알지 이리라는 이름은 모르고 있었다. 이리도 지나 황산과 김제평야의 젖줄이라 할 만 경을 지나 황산벌로 들어서니 백제 의자왕 때(서기 660년) 당나라 소정방과 신라 김유신 장군에 대항해 싸우자 장렬하게 전사한 계백 장군이 생각났다. 엊그제는 백제 최후의 삼천궁녀가 낙화한 백마강의 낙화암 등은 비통한 일들이다.
해는 벌써 서산에 걸려 황산벌도 어슴프게하고 벼는 마치 강가의 갈대처럼 소슬바람에 잔잔한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밤이 되니 농가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잠도 잘 잤다.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고향으로 갔으면 하지만 마음뿐, 김제 신태인 정읍 내장산과 백양사 입구를 지나 신흥이라는 큰 마을 같은 읍의 변두리 농가에 들어갔다. 밥값만 낼 테니 하루 자고 가자고 하니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사실은 우리가 가진 옷을 돈 대신 주었다.)
깊은 산중이어서인지 그렇게 덥지 않아 마당 평상에 앉아 주인과 잡담을 했다. 둘러보니 이곳에 철도가 없었다면 인적이 드문 깊은 산중으로 옛날 화적떼의 소굴이나 될 법한 곳이라고 생각됐다. 그러나 주인장은 장성갈재가 험하고 높아 창공을 나는 기러기도 쉬어간다고 하며 경상도에 문경새재가 있다면 전라도에는 장성갈재가 있다고 자랑을 한다.
장성갈재를 걸어 넘는 것은 산짐승이나 못된 산적이 있어 위험하니 기차 굴을 걸어가라 했다. 기차가 불규칙하게 탄약과 인력을 수송하니 걸어가는 도중에 기차 소리가 들리면 굴 벽 밑 물 흐르는 고랑에 엎드리면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우리는 피난 후 매일매일 몇 가지 필수사항을 점검해왔다. 최우선이 발바닥 점검과 양말에 비누칠을 하는 것이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없나, 붉게 부어오른 데는 없나, 비누칠을 해댄 양말은 마치 부드러운 가죽같이 변했다. 다음은 몸통인데 열흘 동안 모기, 빈대, 벼룩, 진드기 등에 물려 피부 전체가 옴이 오른듯했다. 그중에도 덧난 곳을 없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날 아침도 점검을 끝내고 어두운 새벽에 출발하여 철도를 따라 걸어서 굴입구에 다다르니 동녘이 붉어져 있었다. 거침없이 철도 굴로 들어서 넘어지고 수없이 돌멩이도 차면서 거의 뛰다시피 전진했다. 혹시라도 불시에 기차가 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긴박감에 정신없이 한참을 뛰자 앞이 훤하여 나가보니 해는 벌써 중천에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무사히 통과하게 하여 주신 것 감사합니다.
대치, 비아를 지나 광주에 사시는 목포 이모 집에 왔다.
“워마, 이 새끼들아! 내 새끼들아! 느그덜이 살아 있었구나. 느그 엄니는 매일 거지가 지나가도 혹시 느그덜이 아닌가? 유심히 본단다.” “워머- 이놈들아” 하시며 우리를 잡고 우신다.
유난히도 잔정이 많은 이모님을 대하니 우리도 감격해서 눈물이 나고 비슷하게 닮은 어머님 모습이 더욱더 그리웠다. 점심 겸 저녁을 먹고 밥 덩어리 몇 개를 가지고 지체하지 않고 가겠다고 나서니 “응, 그래 가야제. 몸은 성하냐?”고 물으신다. 사실 그간 먹는 것도 부실하기는 했지만 땀을 하도 많이 흘려 몸이 가뿐해진 듯했다. 걷는 것도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었고 집이 가까워 올수록 마음이 조급했다. 다정한 이모님을 마치 귀찮은 사람 털어버리듯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지가 지나가도 느그덜인가 확인했다니 피가 거꾸로 도는 듯했다.
가자, 빨리 가자.
화순을 지나 능주 앞다리를 건너게 됐다. 물가에 앉아 능주 읍을 보고 혹시 어머니가 어릴 때 살았던 고향이 아닌가 생각했다. 물가에 앉아 능주 읍을 보고 혹시 어머니가 어릴 때 살았던 고향이 아닌가 생각했다. 어머님의 택호가 능주 댁이고 또 능주 구 씨였기 때문이다. 능주가 어머님의 고향일거라고 생각하니 별 볼 일 없는 그저 산골 소읍이 다정하고 친밀감이 들었다. 능주가 잘 보이는 어느 주막에서 잤다. 짐을 풀고 내일은 지쳐서 죽더라도 고향에 가자고 다짐을 했다. 험한 것 상관없이 지름길이라면 질러 가리라고 마음을 먹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늘 하던 대로 여행점검을 마치고 마당에 나오니 어젯밤에 같은 주막에서 잔 듯한 사람들이 세수하면서 능주 장이 어떻고 화순 장이 어떻고 하는 것이 보부상들인듯했다. 주인이 나서서 이분들 가는 길이 지름길이라고 따라가라 권해주었다. 그분들을 따라 산길로 가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우리 고향 벌교로 피난 가는 중이라고 대답을 하자 피난이란 말이 생소한 듯 자기들끼리 여순반란 사건 때 부역했던 사람들이 서울로 몸을 피했다가 제 세상을 만나 돌아오나 보라고 멋대로 추측을 한다. 사실 그동안 그런 종류의 의심을 받아왔기 때문에 별로 유의치 않았다.
이양에 도착해 벌교 가는 지름길을 물으니 조성(새재)로 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준다. 말은 쉽게 들었지만, 물어물어 소나무와 잡목으로 뒤덮인 준험한 고개를 넘어 조성에 치맛자락에 안고 있는 광덕산이 여성적이라면 이번 고개는 거칠고 남성적이었다. 여순반란사건 때 율어가 공산 반도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어도 토벌대가 접근하기 힘들었다는 말처럼 그럴만한 곳이라고 생각된다. 조성은 칠팔년전 일제 소학교 시절 호기심에 집을 떠나왔다가 차표를 사지 못해 집에까지 걸어간 경험이 있는 곳이다. 가는 길을 물어볼 필요도 없이 철길을 따라 걸었다.
“무슨 담배요? 좀 팔구가오.”
새재의 철도 굴을 지나 새끼산거리를 지나는데 우리를 담배장수로 오인하고 부른다. 해는 거의 새재에 걸쳐있었고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목을 축이고 갈만한 간이주막이었다. 형님이 담배장사가 아니라고 밝히며 물 한 모금을 청하자 들어오란다. 40대 중반 정도의 껄렁한 놈팽이처럼 보이는 주인의 눈매가 예민하게 우리는 살피는 것이 공산당 특유의 프락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조심하자는 신호를 교환하며 들어갔다.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서울에서 이 아랫마을 무만동에 간다고 대답했지만, 그의 얼굴엔 ‘여수반란 때 부역했던 너희가 서울에 숨어 살다 이제 너희 세상으로 바뀌었다니까 돌아오는구나.’라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돌아가 인민위원회에서 한자리쯤 하게 되면 덕 좀 보겠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안방으로 들어가자 자신의 집에 온 귀한 손님이니 술 한 잔 하고 싶다며 당시 비밀리에 내린 꽃 소주와 피문어를 내놓는다. 피문어는 큰 문어를 눌러 고급스럽게 상품화한 것으로 주로 제사상에 오르거나 환자의 영양식으로 많이 쓰였다. 어렸을 적 외가에 식량을 얻으러 갈 때 할아버지, 할머니 잡수시라고 우리에게 들려 보낼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피곤함에 찌들고 마치 피부병마저 앓고 있는 듯이 남루해 보이는 우리에게 이런 융숭한 대접을 하는 속뜻이 짐작이 갔다.
능주에서 벌교까지 200여 리의 길을 산길, 들길, 험한 길을 가리지 않고 질러온 덕에 100여 리로 줄일 수 있었지만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거기에 집에 가까워져 간다는 흥분과 감격 안도감 등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독한 술을 마시자 빠르게 허물어져 내린다.
술을 마셔도 형님과 나는 반응이 틀리다. 나는 마셔도 침착하지만, 형님은 금방 흥분하여 공격적으로 변한다. 주인장은 계속 잔을 권하며 이리저리 떠보는 듯한 말을 던지면서 좋은 기회라도 건지려 들었지만 의도했던 만큼의 소득은 얻지 못했다.
어물 저물 밤이 깊어져 가겠다고 하니 주인장은 바로 아래 과수원에서 산 듯한 배 한 포대를 주며 가져가란다.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과 허물어지려는 몸을 추스르고 본래 가지고 있던 짐에 배 한 자루까지 얻어 어둠 속을 갈지자걸음으로 걷다가 넘어지다가 하며 동구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개가 짖고 잠이 없는 할아버지의 담뱃재를 터는 소리, 헛기침소리가 난다. 집이 가까울수록 기쁜 마음과 억울함으로 들떠 올랐다.
마침내 대나무로 엮은 우리 집 문 앞에 다다라 ‘왔습니다.’ 라고 외쳤지만 그건 기분뿐, 실제로는 소리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답답해서 손으로 문을 힘차게 두드리자 놀란 개가 요란하게 짖어댔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주 기쁘거나 아주 슬프면 웃음도 울음도 안 나는 건가 계속 울먹이며 문을 두들겼다. 드디어 아버님이 방문 건너에서 ‘거 뉘기여?’하며 동정을 살피신다. 당시의 밤손님은 무엇보다 더 두려운 존재…
대 여섯 번을 뉘기여? 뉘기여? 하시다가 대답이 없자 우리 앞에까지 오셔서 누구냐고 물으신다.
그때야 겨우겨우 “영놉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문이 열리고 온 가족이 뛰어 나오며 붙잡고 한바탕 운 것을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가 쓰러져버린 우리는 뒷날 아침까지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어머님이 우리 옷을 다 벗기고 땀과 소금가루, 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몸을 시원한 수건으로 다 닦아내고 삼베 등지 개와 삼베 바지로 바꿔 입히고 이놈들이 정말 내 자식들인지 우리들의 불알을 만져보고 또 만지며 한참이나 지켜보다 주무셨다고 한다.
13일간 사선을 넘나들던 피난일정이 이렇게 끝나고 그리웠던 고향에서 부모님이 지극정성으로 챙겨주시는 영양식을 먹으며 열흘쯤 지나니 몸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활력이 되살아났다. 주시기만 한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만 했다. 그런 자신에게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기만 했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우울해진다.
생전에 아버님은 종종 고생하고 큰 아이들이 빨리 철든다고 하셨다. 고교 후배인 박 군은 젊은 나이에 암이라는 충격적인 죽음의 선고를 받고도 용기를 내어 많은 난관을 거쳐 극복했다. 그 후에도 시간을 만들어 장애인을 위한 자원봉사를 그치지 않고 하고 있다.
우리는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사람들은 좋든 나쁘든 극한 상황을 거치고 나면 인생을 알고 겸손해지고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가 하는 교훈을 얻는 것 같다. 내 자신도 피난 전과 피난 후의 자신은 분명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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